[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이익균점권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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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주임 작성일 25-06-02 02:09 조회 3회 댓글 0건본문
지난달 27일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이준석 후보에 의해 저질러진 압도적으로 해로운 성폭력 발언으로 나라가 들썩거렸는데, 이날 소중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권영국 후보가 이재명 후보에게 이익균점권에 관해 묻자 이재명 후보가 그 필요성만은 인정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물론 이것이 어떻게, 그리고 과연 현실화할 수 있는지는 좀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다. 이준석 후보의 해로운 발언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속에서도 몇몇 언론은 이익균점권을 언급했는데 우리는 한국전쟁과 더불어 잊혔다가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 정권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익균점권을 ‘지금’ 다시 호명할 필요가 있다.
제헌헌법에도 담겨 있었던 조항
1948년 제헌헌법이 제정될 때 가장 논란이 됐던 조항이 제18조 2항이다. 그 내용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서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이다. 바로 이익균점권이다. 자본주의 기업이 얻은 이익을 함께 일한 노동자들에게도 나누어야 한다는 놀라운 조항이 제헌헌법에 담겨 있었다. 그동안 전쟁과 군사독재, 그리고 첨단기술의 위압 아래서 우리의 상상력과 마음가짐이 왜소해지다 못해 파편화되고 말았지만, 가난했던 신생 독립국 시절에는 지금보다 더 꿈이 웅대했다는 게 내가 어느 역사학자에게 들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익균점권은 ‘굴욕적인’ 임금 인상 논리를 넘어 함께 일해 얻은 이익을 동등하게 나눠야 한다는 매우 주인적인 태도와 상상력이다. 이것을 1948년의 제헌헌법에 담았다는 것은, 그 실행 여부와 상관없이 오늘날 우리의 마음가짐을 다잡는 데 아주 긴요한 역사적 사실이 된다. 오늘날 기업이 얻은 이익을 노동자와 나눠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것은 아마도 나날이 척박해지는 사회 분위기와 노동 현장에 수동적으로 방어할 수밖에 없는 처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예수가 베드로에게 사람 낚는 방법을 알려주었듯이, 큰 그물을 준비해야 원하는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법이다. 개별적인 동정과 연민의 감정‘만’으로 우리가 처한 이 난국을 돌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헌헌법에 이익균점권을 넣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사람이 전진한이다. 그는 경상도 상주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주로 우익 민족주의 지도자들과 인연을 맺었다. 훗날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는데, 이때 사상적 전회가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대학 졸업 후에는 협동조합 운동에 투신했다. 협동조합 운동을 했다는 전기적 사실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전진한은 마르크스주의자라기보다는 아나키스트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전진한은 일제에 의해 투옥되는 곡절을 겪다 해방 후에 정치에 참여하게 된다. 간단한 전기적 사실을 통해 보면 전진한은 민중의 상호 부조에 의한 연대가 신생 독립국의 미래라고 봤던 듯하다.
5·16 군사 쿠데타 세력이 제거
전진한이 제헌헌법에 담으려 했던 또 하나의 조항은 노동자의 경영 참가권이었다. 이는 격론 끝에 관철되지 못하고 이익균점권만 제헌헌법의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고 김종철 선생에 따르면, 이익균점권은 노동자의 노동이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는 전진한의 확고한 사상이 밑받침되지 않았으면 주창되기 힘들었으며, 노동이 상품이라는 생각은 19세기의 고루한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한다. 대체로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도 노동(력)이 상품이라는 전제하에 그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관성에 사로잡혀 있지만 노동(력)이 상품이라는 공리는 전통적인 지혜와 관계, 돌봄, 자연에서 태어난 사물들도 상품이라는 논리로 들어가는 입구에 해당된다. 물론 노동(력)이 상품인 엄연한 현실에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이게 관성으로 굳어지면 노동(력)이 상품이라는 전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만다는 점이다. 데이비드 하비는 어느 책에서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지급을 신중하게 다룰 것을 주문했는데, 그렇게 되면 인간의 모든 행위가 상품이 될 수 있음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익균점권이 5·16 군사 쿠데타 세력에 의해 제거된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자본주의 기업이 얻은 이익을 노동자와 함께 나누는 것이 혹 민주주의의 근원에 해당하는 핵심이어서가 아닐까?
민주주의는 원한에 찬 노예들의 합창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주인 된 존재들의 대화와 숙의, 그리고 투쟁과 참여를 통해서만 유지되고 또 좋아진다. 여기서 주인은 노예를 부리는 주인이 아니라 노예 없는 주인, 자신의 노예근성마저 용납하지 않는 주인을 말한다. 이익균점권이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의 최종적인 해결은 아니겠지만 의미가 큰 출발선인 것은 확실하다. 의미와 가치의 생성은 상상력에 관계돼 있고 상상력은 살아 있는 심장에서만 작동하는 법이다.
제헌헌법에도 담겨 있었던 조항
1948년 제헌헌법이 제정될 때 가장 논란이 됐던 조항이 제18조 2항이다. 그 내용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서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이다. 바로 이익균점권이다. 자본주의 기업이 얻은 이익을 함께 일한 노동자들에게도 나누어야 한다는 놀라운 조항이 제헌헌법에 담겨 있었다. 그동안 전쟁과 군사독재, 그리고 첨단기술의 위압 아래서 우리의 상상력과 마음가짐이 왜소해지다 못해 파편화되고 말았지만, 가난했던 신생 독립국 시절에는 지금보다 더 꿈이 웅대했다는 게 내가 어느 역사학자에게 들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익균점권은 ‘굴욕적인’ 임금 인상 논리를 넘어 함께 일해 얻은 이익을 동등하게 나눠야 한다는 매우 주인적인 태도와 상상력이다. 이것을 1948년의 제헌헌법에 담았다는 것은, 그 실행 여부와 상관없이 오늘날 우리의 마음가짐을 다잡는 데 아주 긴요한 역사적 사실이 된다. 오늘날 기업이 얻은 이익을 노동자와 나눠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것은 아마도 나날이 척박해지는 사회 분위기와 노동 현장에 수동적으로 방어할 수밖에 없는 처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예수가 베드로에게 사람 낚는 방법을 알려주었듯이, 큰 그물을 준비해야 원하는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법이다. 개별적인 동정과 연민의 감정‘만’으로 우리가 처한 이 난국을 돌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헌헌법에 이익균점권을 넣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사람이 전진한이다. 그는 경상도 상주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주로 우익 민족주의 지도자들과 인연을 맺었다. 훗날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는데, 이때 사상적 전회가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대학 졸업 후에는 협동조합 운동에 투신했다. 협동조합 운동을 했다는 전기적 사실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전진한은 마르크스주의자라기보다는 아나키스트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전진한은 일제에 의해 투옥되는 곡절을 겪다 해방 후에 정치에 참여하게 된다. 간단한 전기적 사실을 통해 보면 전진한은 민중의 상호 부조에 의한 연대가 신생 독립국의 미래라고 봤던 듯하다.
5·16 군사 쿠데타 세력이 제거
전진한이 제헌헌법에 담으려 했던 또 하나의 조항은 노동자의 경영 참가권이었다. 이는 격론 끝에 관철되지 못하고 이익균점권만 제헌헌법의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고 김종철 선생에 따르면, 이익균점권은 노동자의 노동이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는 전진한의 확고한 사상이 밑받침되지 않았으면 주창되기 힘들었으며, 노동이 상품이라는 생각은 19세기의 고루한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한다. 대체로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도 노동(력)이 상품이라는 전제하에 그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관성에 사로잡혀 있지만 노동(력)이 상품이라는 공리는 전통적인 지혜와 관계, 돌봄, 자연에서 태어난 사물들도 상품이라는 논리로 들어가는 입구에 해당된다. 물론 노동(력)이 상품인 엄연한 현실에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이게 관성으로 굳어지면 노동(력)이 상품이라는 전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만다는 점이다. 데이비드 하비는 어느 책에서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지급을 신중하게 다룰 것을 주문했는데, 그렇게 되면 인간의 모든 행위가 상품이 될 수 있음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익균점권이 5·16 군사 쿠데타 세력에 의해 제거된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자본주의 기업이 얻은 이익을 노동자와 함께 나누는 것이 혹 민주주의의 근원에 해당하는 핵심이어서가 아닐까?
민주주의는 원한에 찬 노예들의 합창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주인 된 존재들의 대화와 숙의, 그리고 투쟁과 참여를 통해서만 유지되고 또 좋아진다. 여기서 주인은 노예를 부리는 주인이 아니라 노예 없는 주인, 자신의 노예근성마저 용납하지 않는 주인을 말한다. 이익균점권이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의 최종적인 해결은 아니겠지만 의미가 큰 출발선인 것은 확실하다. 의미와 가치의 생성은 상상력에 관계돼 있고 상상력은 살아 있는 심장에서만 작동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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