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화이부동]‘극우’보다 무서운 ‘정치의 이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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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주임 작성일 25-06-06 01:31 조회 4회 댓글 0건본문
적어도 민주화 이후 한국에선 그동안 이론으로만 여겨졌던 극우가 뒤늦게 자신의 마각을 드러낸 윤석열이라는 신예 극우 정치인을 통해 그 실체를 보이면서 사회적으로 극우에 대한 열띤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런 논의의 기조는 우려와 공포였다. 아닌 게 아니라 가시화된 극우 세력에 대해 무섭다는 생각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극우로 불린 이들은 극우라는 딱지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미디어오늘’ 기자 박재령은 지난 5월29일자에 “언론은 어디까지를 ‘극우’라 쓸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런 의제를 던졌다. “윤석열 전 대통령 지지 단체나 유튜버들이 자신을 ‘극우’로 표현한 언론에 대해 최근 언론중재위원회 제소 등을 통해 반발하고 있다. 극우의 기준에 자신들이 부합하지 않는데 언론이 표현을 섣부르게 썼다는 주장이다. 언론은 내란을 옹호하는 자들을 극우라 쓸 수 없는 걸까.”
이 기사에서 다룬 ‘자유대학’의 경우를 보자. 윤석열 지지 단체 중 하나인 자유대학은 자신들을 극우로 표현한 4월17일자 MBC 기사가 “모욕에 해당한다”며 언론중재위원회 정정보도 및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자유대학 측은 “친중·친북 전체주의를 반대하는 자유대학과 극우는 연결될 수 없는 것”이라며 “현대적 다원주의를 옹호하고 보편적 기득권을 부정한 사실이 전혀 없으므로 (자유대학을) 극우 단체로 볼 수 없다”고 했다.
자유대학 측은 극우의 기준을 설명한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신진욱의 경향신문 인터뷰(1월22일)를 인용하며 이러한 주장을 폈다. 신진욱은 인터뷰에서 “(극단주의는) 민주주의·인권·평등·법치같이 사회가 합의한 보편적 가치를 부정한다는 것”이라며 “평등의 가치를 부정하는 특성이 가장 강하다. 계층·성별·인종에 상관없이 보편적 기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격렬한 저항과 증오를 나타낸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신진욱은 계엄 옹호 자체가 극우 기준에 부합한다고 봤다. 그는 “극우의 정의 역시 완전한 합의는 없다”면서도 “‘내가 미워하는 정당과 사회집단을 없애기 위해 민주주의를 중지시킬 수도 있다’(계엄 옹호), ‘내가 위험하다고 여기는 사람이나 기관을 무력화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서부지법 폭동), ‘이 사회와 정부가 적(공산당 등)에 의해 점령되어 있다’(부정선거론) 등의 생각들은 전 세계의 극우 연구에서 널리 관찰되는 전형적인 세계관”이라고 평가했다.
한국 극우, 서양 극우와 크게 달라
미디어오늘 기사에 인용된 더가능연구소 대표 서복경의 말마따나 지금 시기는 “한국에서 ‘극우’가 정의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앞으로 시간이 더 흐른다고 해서 극우의 정의가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 같진 않다는 데에 있다. 우리는 오랜 세월 극우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 서양의 극우 개념을 가져다 쓰고 있는데, 한국의 극우는 이 ‘서양 극우’와 크게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미 서양에서 때가 묻어 부정적 함의를 강하게 풍기는 극우라는 단어를 그대로 쓰면서 공정한 논의에 임할 수 있을까?
서양 극우와 한국 극우는 어떻게 다른가? ‘누가 한국의 극우인가? 한국 극우의 특징과 정치적 함의’(황인정)라는 논문을 소개한 주간경향 특집 기사(3월3일)에 따르면, 보통 ‘극우’는 민주주의적 가치를 직접적으로 반대하고 폭력도 불사하는 집단을 지칭하지만 한국의 극우는 “민주주의가 항상 최선은 아니다”라는 태도를 공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유럽의 극우는 주로 이민자를 희생양으로 삼지만 한국의 극우는 여성, 소위 ‘종북세력’, 중국인 등을 희생양으로 삼는 특징을 보인다.
또 ‘한국적 극우 포퓰리즘 담론의 구조와 전파 양상’(김종우)이라는 논문을 소개한 미디어오늘 기사(4월22일)에 따르면, “유럽에서 나타나는 극우 포퓰리즘은 주로 ‘반이민’ ‘반다문화’ ‘반지성주의’ 등을 핵심 이슈로 삼는다. 반면 한국의 극우 담론은 ‘냉전적 반공주의’를 중심으로 구조화됐다. 또 법조인 등 전문가 주도의 극우 채널이 큰 비중을 차지해 엘리트주의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와 달리 유럽의 극우 포퓰리즘은 ‘반엘리트주의’적 성격을 보인다”고 했다.
개념이자 실체로서 극우의 견고성과 지속성도 따져볼 문제다.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장석준이 ‘한겨레’ 칼럼(3월20일)에서 지적했듯이, 서양 극우와 한국 극우 사이엔 이런 큰 차이가 있다. “유럽의 극우 정치는 신자유주의 전성기에 생활 수준이나 지위가 추락한 사회집단에 단단히 똬리를 틀고 있다. 그래서 강력하며, 극복되기 쉽지 않다. 반면 한국의 극우파는 친위쿠데타 발발 이후 급속히 전방위적으로 세를 불리고 있지만, 특정 집단이 자기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 세력으로 인정해줄 만큼 이 사회에 자리를 잡지는 못한 상태다.”
이 정도의 차이라면 서양 극우와 한국 극우를 같은 극우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서양에서 극우에 묻은 때를 지울 수 없다면, 아예 다른 용어를 사용하는 게 공정하지 않겠느냐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한국의 극우는 주로 ‘정치적 양극화’와 ‘진영주의’의 산물일 가능성이 높다. 주간조선이 트랜드리서치에 의뢰해 5월17~19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번 대선에서 투표를 한다면 “상대 후보가 싫어서 그의 당선을 막기 위해 투표하겠다”가 57%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사회의 극우 현상을 분석한 ‘주간경향’ 1618호(2025년 3월3일)의 표제가 잘 포착했듯이, “극우가 됐다. 저쪽이 싫어서”라는 이유가 의미심장하다. 단지 “저쪽이 싫어서” 하게 된 반작용에 가까운 일련의 언행을 한국의 독특한 상황에 대한 고찰 없이 유럽 모델을 가져와 피상적인 외양만 보고 극우로 판단해도 괜찮을까? 사회과학적 개념의 정의를 특수한 사건 중심으로 판단해도 괜찮은 건지 그것도 의문이다. 12·3 계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극우 여부를 가리겠다면, 극우의 규모는 유권자의 20%(880만명) 안팎으로 추산할 수 있다는데, 이게 정녕 사회과학적인 평가 방법일까?
극우의 규모를 과대평가하는 건 무섭고 두려운 극우에 대한 유비무환의 취지로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건 과거에 무섭고 두려운 공산주의에 대한 유비무환의 취지로 빨갱이 타령을 남발했던 것과 얼마나 다를까? 왜 우리는 “저쪽이 싫은” 이유에 대해선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걸까? 만약 그 이유가 정치가 승자독식 체제하에서 ‘이권 산업’으로 전락한 것과 무관치 않다면, 우리가 정작 무서워해야 할 것은 ‘극우’라기보다는 ‘정치의 이권화’가 아닐까?
평상시엔 자신이 중도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지만 선거 때만 되면 중도가 사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지식인이 사석에서 했다는 다음 말에 그 이유가 잘 담겨 있다. “중도는 설 땅이 없죠. 좋든 싫든 한 진영을 선택해야 발언과 영향력, 자리와 계급을 보장받거든요.” ‘정치의 이권화’가 심화할수록 진영주의가 심해지고 그런 토양에서 극우도 나타날 텐데, 왜 우리는 ‘정치의 이권화’엔 눈을 감은 채 그로 인해 나타난 증상에 대해서만 주목하는 걸까?
‘정치의 이권화’ 약화시켜야
대선은 그 어떤 숭고한 명분을 내세울망정 이권의 분배를 결정하는 국가적 차원의 ‘밥그릇 전쟁’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미국 대통령은 장차관 등 상원의 동의가 필요한 600개 정도의 직위를 비롯해 6000개 직위의 인력을 직접 임명한다. 한국의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는 자리는 중앙부처 장차관, 공공기관 기관장·감사 등 어림잡아도 3000~4000개에 이르며 법원, 검찰, 공영방송, 각종 협회 등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까지 포함하면 수만개에 달한다는 주장도 있다. 속된 말로 ‘안면몰수’하는 줄서기와 편가르기가 괜히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이건 정치 냉소가 아니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현실의 한 측면이다. 그런데 우리는 점잖지 못하다는 이유로 이런 문제는 거의 건드리지 않는다. ‘정치의 이권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돌린 채 그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적 갈등의 극렬함에만 주목하면서 ‘극우 경보령’을 발동하느라 바쁘다. 오늘 취임하는 새 대통령이 이런 현실에도 주목하면서 보통사람들의 일상적 삶에까지 파고든 ‘정치의 이권화’와 그 기반이라 할 승자독식 체제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하지만 극우로 불린 이들은 극우라는 딱지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미디어오늘’ 기자 박재령은 지난 5월29일자에 “언론은 어디까지를 ‘극우’라 쓸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런 의제를 던졌다. “윤석열 전 대통령 지지 단체나 유튜버들이 자신을 ‘극우’로 표현한 언론에 대해 최근 언론중재위원회 제소 등을 통해 반발하고 있다. 극우의 기준에 자신들이 부합하지 않는데 언론이 표현을 섣부르게 썼다는 주장이다. 언론은 내란을 옹호하는 자들을 극우라 쓸 수 없는 걸까.”
이 기사에서 다룬 ‘자유대학’의 경우를 보자. 윤석열 지지 단체 중 하나인 자유대학은 자신들을 극우로 표현한 4월17일자 MBC 기사가 “모욕에 해당한다”며 언론중재위원회 정정보도 및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자유대학 측은 “친중·친북 전체주의를 반대하는 자유대학과 극우는 연결될 수 없는 것”이라며 “현대적 다원주의를 옹호하고 보편적 기득권을 부정한 사실이 전혀 없으므로 (자유대학을) 극우 단체로 볼 수 없다”고 했다.
자유대학 측은 극우의 기준을 설명한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신진욱의 경향신문 인터뷰(1월22일)를 인용하며 이러한 주장을 폈다. 신진욱은 인터뷰에서 “(극단주의는) 민주주의·인권·평등·법치같이 사회가 합의한 보편적 가치를 부정한다는 것”이라며 “평등의 가치를 부정하는 특성이 가장 강하다. 계층·성별·인종에 상관없이 보편적 기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격렬한 저항과 증오를 나타낸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신진욱은 계엄 옹호 자체가 극우 기준에 부합한다고 봤다. 그는 “극우의 정의 역시 완전한 합의는 없다”면서도 “‘내가 미워하는 정당과 사회집단을 없애기 위해 민주주의를 중지시킬 수도 있다’(계엄 옹호), ‘내가 위험하다고 여기는 사람이나 기관을 무력화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서부지법 폭동), ‘이 사회와 정부가 적(공산당 등)에 의해 점령되어 있다’(부정선거론) 등의 생각들은 전 세계의 극우 연구에서 널리 관찰되는 전형적인 세계관”이라고 평가했다.
한국 극우, 서양 극우와 크게 달라
미디어오늘 기사에 인용된 더가능연구소 대표 서복경의 말마따나 지금 시기는 “한국에서 ‘극우’가 정의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앞으로 시간이 더 흐른다고 해서 극우의 정의가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 같진 않다는 데에 있다. 우리는 오랜 세월 극우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 서양의 극우 개념을 가져다 쓰고 있는데, 한국의 극우는 이 ‘서양 극우’와 크게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미 서양에서 때가 묻어 부정적 함의를 강하게 풍기는 극우라는 단어를 그대로 쓰면서 공정한 논의에 임할 수 있을까?
서양 극우와 한국 극우는 어떻게 다른가? ‘누가 한국의 극우인가? 한국 극우의 특징과 정치적 함의’(황인정)라는 논문을 소개한 주간경향 특집 기사(3월3일)에 따르면, 보통 ‘극우’는 민주주의적 가치를 직접적으로 반대하고 폭력도 불사하는 집단을 지칭하지만 한국의 극우는 “민주주의가 항상 최선은 아니다”라는 태도를 공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유럽의 극우는 주로 이민자를 희생양으로 삼지만 한국의 극우는 여성, 소위 ‘종북세력’, 중국인 등을 희생양으로 삼는 특징을 보인다.
또 ‘한국적 극우 포퓰리즘 담론의 구조와 전파 양상’(김종우)이라는 논문을 소개한 미디어오늘 기사(4월22일)에 따르면, “유럽에서 나타나는 극우 포퓰리즘은 주로 ‘반이민’ ‘반다문화’ ‘반지성주의’ 등을 핵심 이슈로 삼는다. 반면 한국의 극우 담론은 ‘냉전적 반공주의’를 중심으로 구조화됐다. 또 법조인 등 전문가 주도의 극우 채널이 큰 비중을 차지해 엘리트주의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와 달리 유럽의 극우 포퓰리즘은 ‘반엘리트주의’적 성격을 보인다”고 했다.
개념이자 실체로서 극우의 견고성과 지속성도 따져볼 문제다.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장석준이 ‘한겨레’ 칼럼(3월20일)에서 지적했듯이, 서양 극우와 한국 극우 사이엔 이런 큰 차이가 있다. “유럽의 극우 정치는 신자유주의 전성기에 생활 수준이나 지위가 추락한 사회집단에 단단히 똬리를 틀고 있다. 그래서 강력하며, 극복되기 쉽지 않다. 반면 한국의 극우파는 친위쿠데타 발발 이후 급속히 전방위적으로 세를 불리고 있지만, 특정 집단이 자기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 세력으로 인정해줄 만큼 이 사회에 자리를 잡지는 못한 상태다.”
이 정도의 차이라면 서양 극우와 한국 극우를 같은 극우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서양에서 극우에 묻은 때를 지울 수 없다면, 아예 다른 용어를 사용하는 게 공정하지 않겠느냐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한국의 극우는 주로 ‘정치적 양극화’와 ‘진영주의’의 산물일 가능성이 높다. 주간조선이 트랜드리서치에 의뢰해 5월17~19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번 대선에서 투표를 한다면 “상대 후보가 싫어서 그의 당선을 막기 위해 투표하겠다”가 57%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사회의 극우 현상을 분석한 ‘주간경향’ 1618호(2025년 3월3일)의 표제가 잘 포착했듯이, “극우가 됐다. 저쪽이 싫어서”라는 이유가 의미심장하다. 단지 “저쪽이 싫어서” 하게 된 반작용에 가까운 일련의 언행을 한국의 독특한 상황에 대한 고찰 없이 유럽 모델을 가져와 피상적인 외양만 보고 극우로 판단해도 괜찮을까? 사회과학적 개념의 정의를 특수한 사건 중심으로 판단해도 괜찮은 건지 그것도 의문이다. 12·3 계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극우 여부를 가리겠다면, 극우의 규모는 유권자의 20%(880만명) 안팎으로 추산할 수 있다는데, 이게 정녕 사회과학적인 평가 방법일까?
극우의 규모를 과대평가하는 건 무섭고 두려운 극우에 대한 유비무환의 취지로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건 과거에 무섭고 두려운 공산주의에 대한 유비무환의 취지로 빨갱이 타령을 남발했던 것과 얼마나 다를까? 왜 우리는 “저쪽이 싫은” 이유에 대해선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걸까? 만약 그 이유가 정치가 승자독식 체제하에서 ‘이권 산업’으로 전락한 것과 무관치 않다면, 우리가 정작 무서워해야 할 것은 ‘극우’라기보다는 ‘정치의 이권화’가 아닐까?
평상시엔 자신이 중도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지만 선거 때만 되면 중도가 사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지식인이 사석에서 했다는 다음 말에 그 이유가 잘 담겨 있다. “중도는 설 땅이 없죠. 좋든 싫든 한 진영을 선택해야 발언과 영향력, 자리와 계급을 보장받거든요.” ‘정치의 이권화’가 심화할수록 진영주의가 심해지고 그런 토양에서 극우도 나타날 텐데, 왜 우리는 ‘정치의 이권화’엔 눈을 감은 채 그로 인해 나타난 증상에 대해서만 주목하는 걸까?
‘정치의 이권화’ 약화시켜야
대선은 그 어떤 숭고한 명분을 내세울망정 이권의 분배를 결정하는 국가적 차원의 ‘밥그릇 전쟁’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미국 대통령은 장차관 등 상원의 동의가 필요한 600개 정도의 직위를 비롯해 6000개 직위의 인력을 직접 임명한다. 한국의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는 자리는 중앙부처 장차관, 공공기관 기관장·감사 등 어림잡아도 3000~4000개에 이르며 법원, 검찰, 공영방송, 각종 협회 등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까지 포함하면 수만개에 달한다는 주장도 있다. 속된 말로 ‘안면몰수’하는 줄서기와 편가르기가 괜히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이건 정치 냉소가 아니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현실의 한 측면이다. 그런데 우리는 점잖지 못하다는 이유로 이런 문제는 거의 건드리지 않는다. ‘정치의 이권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돌린 채 그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적 갈등의 극렬함에만 주목하면서 ‘극우 경보령’을 발동하느라 바쁘다. 오늘 취임하는 새 대통령이 이런 현실에도 주목하면서 보통사람들의 일상적 삶에까지 파고든 ‘정치의 이권화’와 그 기반이라 할 승자독식 체제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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