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노동, 땀의 대가가 이제 꿈이 아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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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주임 작성일 25-06-11 03:07 조회 0회 댓글 0건본문
2025년 6월2일, 김충현씨(50)가 태안화력발전소에서 기계에 끼여 사망했다. 이곳은 2018년 김용균씨가 홀로 작업 중 목숨을 잃은 바로 그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7년이 지난 지금도 ‘김용균 특별조사위원회’의 권고안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김충현씨의 죽음을 더욱 안타깝게 만드는 것은 그의 책상 위에 <이재명과 기본소득>이라는 책이 놓여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꿈꾸던 세상까지 단 이틀이 모자랐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가 흘려온 땀의 대가는 참으로 가혹하다.
이재명 정부는 민생 경제의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우고 있으며, ‘실용적 시장주의’와 ‘공정 성장’을 핵심 기조로 삼고 있다.
시민의 삶이 나아지고, 경제지표가 개선되며, 기업이 함께 성장하는 사회는 분명 이상적이다. 하지만 경제 활성화에 집중할수록, 정작 위험에 노출된 노동 현장이 외면받지는 않을지 우려된다. 물론 기존 법규의 철저한 준수와 ‘중대재해처벌법’의 엄정한 집행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제도 개혁에 앞서, 우리는 노동의 본질적 가치와 그에 상응하는 정당한 보상이 무엇인지 자문해야 한다. 만약 그 가치가 제대로 ‘지불되지 않는 사회’라면, 민생이 나아지고 경제지표가 회복된다 해도 그 변화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산업재해가 사라지고 체불임금이 해소된다 해도-물론 이것조차 쉽지 않지만- 노동이 ‘보람’으로 여겨지고 ‘존중’받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피로가 과로의 결과가 아니라 노력의 동의어로, 땀이 임금의 크기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날은 단지 대통령의 의지나 정부 정책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사회적 성찰과 집단적 의지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역사는 인간의 노동을 어떻게 이해해왔으며 우리는 지금 어디에 도달해 있는가. 인공지능이 인간 지능을 대체하기에 앞서, 인간의 몸은 이미 자동화 기계와 디지털 기술에 의해 다양한 시공간에서 대체돼왔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의 몸은 과학의 이름 아래 생물학적 존재에서 물리학적 법칙을 따르는 기계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100여년 전, 세포의 신비에 매료된 서구 과학자들은 세포의 작동 원리가 인간 사회를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생물학적 발견은 사회 이론의 기초로까지 확장됐다.
이 과학적 경이로움은 단지 사회에 대한 이해에 머물지 않았다. 유발 하라리의 지적처럼, 과학의 진보는 자본주의의 전개와 궤를 같이했다. 생물학적 이해는 곧 노동자의 신체에 대한 이해로 이어졌고, 특히 독일에서는 ‘인간공학(ergonomics)’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세포가 효율과 균형 속에서 정교하게 작동하듯, 노동자의 몸도 기계의 부속품처럼 이해됐고, 최소한의 에너지로 최대의 효율을 내도록 요구받았다.
이러한 통찰은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유럽 지성사 및 근현대사 명예교수인 앤슨 라빈바흐가 (1990)에서 서술한 바에 기초한다. 라빈바흐에 따르면, 노동자의 몸은 동일한 에너지 투입으로 피로를 최소화하는 효율적인 ‘인간 모터’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인간 모터’가 1950~1960년대 이후 컴퓨터화, 사이버네틱스, 로봇공학 등 자동화 기술의 발전과 함께 점차 노동의 중심 논의에서 밀려났다고 진단하며 이로 인해 노동의 유토피아는 후퇴했다고 강조한다.
오늘날 사회는 인공지능을 앞세워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현실 속 노동자들은 여전히 피로에 짓눌려 있다. ‘인간 모터’는 과열된 채 피로를 축적하며 작동하고, 각종 소비와 대중문화는 그 피로를 일시적인 쾌락으로 중화시킨다. 그 과정에서 노동의 의미와 가치, 정당한 보상에 대한 성찰은 점차 주변화됐다. 오늘날의 노동은 더 이상 근육과 신경 생리학에 기반하지 않으며, 그 신체적 기반은 이미 반세기 전부터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됐다. 어떤 이는 현대의 노동을 “근육 없는 정보의 잔여물”이라 일컬었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체감하듯, 아무리 노동이 디지털화됐더라도 인간의 몸은 여전히 피로하며, 에너지는 소진되고, 고통은 실재한다.
100년 전 과학자들이 강조했던 이 자명한 진실은, 왜 오늘날 인공지능에 열광하는 사회 속에서 망각되는가. 기술이 진보할수록 왜 노동하는 몸은 더욱 퇴행하고, 더 지쳐만 가는가. 이제는 가쁜 숨을 멈추고 이 질문들을 차분히 되새겨야 할 때다. 새 정부를 탄생시킨 시민들에게는, 이러한 질문을 던질 자격이 충분하다.
이재명 정부는 민생 경제의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우고 있으며, ‘실용적 시장주의’와 ‘공정 성장’을 핵심 기조로 삼고 있다.
시민의 삶이 나아지고, 경제지표가 개선되며, 기업이 함께 성장하는 사회는 분명 이상적이다. 하지만 경제 활성화에 집중할수록, 정작 위험에 노출된 노동 현장이 외면받지는 않을지 우려된다. 물론 기존 법규의 철저한 준수와 ‘중대재해처벌법’의 엄정한 집행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제도 개혁에 앞서, 우리는 노동의 본질적 가치와 그에 상응하는 정당한 보상이 무엇인지 자문해야 한다. 만약 그 가치가 제대로 ‘지불되지 않는 사회’라면, 민생이 나아지고 경제지표가 회복된다 해도 그 변화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산업재해가 사라지고 체불임금이 해소된다 해도-물론 이것조차 쉽지 않지만- 노동이 ‘보람’으로 여겨지고 ‘존중’받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피로가 과로의 결과가 아니라 노력의 동의어로, 땀이 임금의 크기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날은 단지 대통령의 의지나 정부 정책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사회적 성찰과 집단적 의지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역사는 인간의 노동을 어떻게 이해해왔으며 우리는 지금 어디에 도달해 있는가. 인공지능이 인간 지능을 대체하기에 앞서, 인간의 몸은 이미 자동화 기계와 디지털 기술에 의해 다양한 시공간에서 대체돼왔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의 몸은 과학의 이름 아래 생물학적 존재에서 물리학적 법칙을 따르는 기계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100여년 전, 세포의 신비에 매료된 서구 과학자들은 세포의 작동 원리가 인간 사회를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생물학적 발견은 사회 이론의 기초로까지 확장됐다.
이 과학적 경이로움은 단지 사회에 대한 이해에 머물지 않았다. 유발 하라리의 지적처럼, 과학의 진보는 자본주의의 전개와 궤를 같이했다. 생물학적 이해는 곧 노동자의 신체에 대한 이해로 이어졌고, 특히 독일에서는 ‘인간공학(ergonomics)’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세포가 효율과 균형 속에서 정교하게 작동하듯, 노동자의 몸도 기계의 부속품처럼 이해됐고, 최소한의 에너지로 최대의 효율을 내도록 요구받았다.
이러한 통찰은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유럽 지성사 및 근현대사 명예교수인 앤슨 라빈바흐가 (1990)에서 서술한 바에 기초한다. 라빈바흐에 따르면, 노동자의 몸은 동일한 에너지 투입으로 피로를 최소화하는 효율적인 ‘인간 모터’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인간 모터’가 1950~1960년대 이후 컴퓨터화, 사이버네틱스, 로봇공학 등 자동화 기술의 발전과 함께 점차 노동의 중심 논의에서 밀려났다고 진단하며 이로 인해 노동의 유토피아는 후퇴했다고 강조한다.
오늘날 사회는 인공지능을 앞세워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현실 속 노동자들은 여전히 피로에 짓눌려 있다. ‘인간 모터’는 과열된 채 피로를 축적하며 작동하고, 각종 소비와 대중문화는 그 피로를 일시적인 쾌락으로 중화시킨다. 그 과정에서 노동의 의미와 가치, 정당한 보상에 대한 성찰은 점차 주변화됐다. 오늘날의 노동은 더 이상 근육과 신경 생리학에 기반하지 않으며, 그 신체적 기반은 이미 반세기 전부터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됐다. 어떤 이는 현대의 노동을 “근육 없는 정보의 잔여물”이라 일컬었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체감하듯, 아무리 노동이 디지털화됐더라도 인간의 몸은 여전히 피로하며, 에너지는 소진되고, 고통은 실재한다.
100년 전 과학자들이 강조했던 이 자명한 진실은, 왜 오늘날 인공지능에 열광하는 사회 속에서 망각되는가. 기술이 진보할수록 왜 노동하는 몸은 더욱 퇴행하고, 더 지쳐만 가는가. 이제는 가쁜 숨을 멈추고 이 질문들을 차분히 되새겨야 할 때다. 새 정부를 탄생시킨 시민들에게는, 이러한 질문을 던질 자격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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