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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7000명이 쌓고, 1만4140명이 고쳤다’…신라 왕실의 ‘저수지’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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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주임 작성일 25-06-04 11:13 조회 1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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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인 1946년 어느 날이었다. 대구사범대에 재직 중이던 금석학자 임창순(1914~1999)이 길을 걷다가 대구 대안동의 어느 집(서태균의 집) 앞에 놓인 둥근 형태의 비석을 발견했다. 임창순 선생은 단박에 ‘명문 신라 고비’로 판단했다.
집주인(서태균)에게 물으니 “매입한 적산가옥(일제강점기 일본인의 집)을 수리하다가 부엌 부근에서 발견한 비석”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이 비석의 원 위치는 알 수 없었다. 후속 연구(하일식 연세대 교수)에 따르면 비석이 발견된 대안동 서태균의 집이 조선시대 경상 감영에 속해있었다. 따라서 누군가 이 근처에 서있던 비석을 관청(경상 감영)으로 옮겨놓았을 가능성이 짙다. 임창순은 이 비석을 ‘무술(戊戌) 오작비(塢作碑)’로 명명했다.
“무술년(578·진지왕 3)에 영동리촌에 ‘오(塢)’라는 시설을 축조한 뒤 공사 내역을 기록한 비석’으로 읽은 것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역사서에도 보이지 않는 ‘오(塢)’가 어떤 시설일까. 임창순은 중국에서 그 용례를 찾았다.
즉 <설문해자>와 <강희자전>, <사원> 등에 따르면 ‘오(塢)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군사용 제방(보루)이며. 때때로 마을의 허술함을 보충하고 홍수 방지용으로도 쓰였다’는 것이다.
■우연히 발견된 ‘오(塢)’의 정체는?
그런데 1968년 12월 ‘오(塢)’의 정체를 밝혀주는 명문 비석 2기가 경북 영천에서 발견된다.
당시 한국일보가 주관한 ‘신라 삼산(三山) 학술 조사단’이 영천을 답사중이었다. <삼국사기>(‘잡지’)는 “신라는 국왕이 주재하는 국사 제사를 나력(경주 낭산 추정)과 골화(영천 금강산 추정), 혈례(청도 오례산?) 등 3산에서 치렀다”고 했다. 조사단은 삼산 중 한 곳으로 영천 지역을 답사하다가 읍내에서 몇몇 유지를 만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청못이라는 저수지에 당나라 비석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영천의 역사를 담은 <영양지>에 “영천군의 남쪽 10리쯤에 있는 청천제(청못)에 당나라 정관 연간(626~649)에 세운 비석이 있는데, 둘레가 5882척, 수심 16척”이라는 기록이 있었다.
신빙성이 ‘빵빵한’ 증언이었다. 12월 19일 답사단이 달려간 청못은 읍내에서 6㎞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지금도 금호강 동편 드넓은 평야의 수리를 맡고 있는 저수지였다. 과연 청못의 북쪽 40m 되는 골짝의 비탈에 비석이 2기 나란히 서 있었다. 예부터 주민들은 물론이고 멀리서 찾아온 낚시꾼들에게까지 잘 알려진 비석이었지만 그 가치를 아는 이들은 없었다.
비석 2기 중 1기에는 앞 뒷면에 모두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한쪽 면에 ‘병진년 2월8일’ 명문을 시작으로 100여 자의 글자가 나타났다. 그 비석의 다른 면에는 ‘정원14년(798) 무인 4월’자를 필두로 100여자의 글씨가 보였다. 다른 1기는 ‘강희27년(1688) 무진 9월’라는 간지가 또렷한 비석이었다.
■청제와 대오
후속 판독결과 명문 비석의 실체가 드러났다. ‘병진’명 쪽 면에 일찍이 방어용 제방으로 지목되었던 ‘오(塢)’자가 보이고, ‘정원14년’명 쪽에 현재의 ‘저수지 이름(청못)’을 연상케하는 ‘청제’가 연결되었다. 정리하자면 ‘병진’명과 ‘정원’명이 앞 뒤로 새겨진 비석 1기는 ‘병진년(법흥왕 23·536)에 큰 제방(대오·大塢)을 쌓았고’(앞면), ‘정원14년(원성왕 14·798) 청제를 대대적으로 수리한’(뒷면) 공사 내역을 기록한 것이었다.
또 다른 1기 역시 청제(청못)와 관련된 비석으로 해석됐다. 계사년(1653·효종4) 훼손된채 땅에 묻혀있던 청제의 건립 및 수리비를 강희 27년(1688·숙종 14) 일으켜 세운 사실을 기념하여 기록한 ‘중립비(重立碑)’였다.
말하자면 이 두 기의 비석은 ‘청제(청못)’라는 저수지를 쌓고(앞면 건립비) 대대적으로 수리한(뒷면 수리비) 1기와, 훗날 매몰된 청제비를 일으켜 세운 뜻을 기념한(‘강희 17년’명·중립비) 1기임을 알 수 있다. 이 두 기의 비석에 ‘청제비’라는 이름이 붙었다.
무술오작비의 ‘오(塢)’는 청제비에서 ‘대오(大塢)’로 등장한다. 중국에서 군사용 방어 제방(보루)으로 해석되는 ‘오(塢)’가 신라에서는 ‘관개용 저수지 제방’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건립비(‘병진’ 명)는 그냥 오(塢)가 아니라 대오(大塢), 즉 대규모 저수지 제방으로 표기했으며, 그것을 수리비(‘정원14년’명)에서는 청제로 바꿔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
■536년의 생생 기록?
그런데 수리비(‘정원14년’)나 중립비(‘강희27년’)에는 연호가 새겨져 있으니 논란이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병진’명은 왜 ‘건립비’라 하고 그 연대를 536년으로 특정하는가.
우선 “531년(법흥왕 18) 3월에 담당 관청에 명하여 제방을 수리하게 하였다”는 <삼국사기>(‘법흥왕’조) 기록이 눈에 밟힌다. ‘수리’라는 내용에 주목한다면 ‘476년 병진년(자비왕 19)’에 축조한 저수지를 이때(531년) ‘수리’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536년 병진년(법흥왕 18) 축조설’이 학계의 다수설이다. 우선 신라에서 ‘경위(京位·왕경 출신 관료의 관등)’는 6세기 초에 성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청제 건립비(‘병진’명)에는 대사제(大舍第·12관등) 소사제(小舍第·13관등) 대오제(大烏第·15관등) 등 경위가 보인다.
또 ‘관직명’을 표기할 때 ‘제지(帝智 또는 第智)’라는 어미를 사용하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지(智)’자가 탈락하고 제(帝 혹은 第)만 사용된다.(김재홍 국립중앙박물관장)
그러다가 그마저도 ‘제’자가 사라지고 관직명(대사·소사·대오 등)만 남게 된다. 그런데 울진 봉평리비(524)와 천전리 서석(525)에는 ‘~제지’가 어미로 등장한다. 따라서 경위에 ‘~제’ 어미만 남은 청제 건립비(‘병진’명)는 봉평비와 천천지 서석보다 늦은 단계의 비석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울진 봉평비(524)-경주 명활산성비(551)-창녕 진흥왕 척경비(561)-대구 무술 오작비(578) 등은 모두 간지를 앞세웠다. 즉 갑진(봉평비)-신미(명활산성비)-신사(척경비)-무술(오작비) 등이다. 반면 503년 건립된 냉수리비(503)는 간지 대신 ‘사라(신라)훼(斯羅喙)~’로 시작한다.
물론 가장 오래된 비석으로 추정되는 포항 중성리비(501년 혹은 441년)도 ‘신사’로 시작되기는 한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524~578년 사이에 건립된 비석이 모두 ‘간지’로 시작되는 것에 주목하여 ‘청제 건립비의 병진=536년’으로 해석하고 있다.
■7000~1만4000명 동원
구체적인 비문의 내용은 알아보자. 청제 건립비는 대규모 제방(저수지·大塢)을 준공한 내역을 자세히 기록했다.
‘병진년(536) 2월8일 (준공한) 탁곡에 있는 대오(저수지)다. 저수지의 아랫변 길이는 61심, 윗변 길이는 92심, 바닥너비는 32심, 둑의 높이는 8심, 위의 너비는 3심이다. 동원 인원은 7000명이고 280방으로 나눠 작업. 공사책임자인 사인은 훼부의 안척사지 대사제, 척차추 소사제, 휴리 대오제…(현지 관리인은) 중사촌의 자시리 간지, 사이리이다.’
그때 건립된 제방은 262년 뒤(798) 둑이 훼손됐다는 보고에 따라 대대적인 수리에 나선다. 그 공사내역을 새긴 것이 ‘건립비’ 뒷면에 기록된 ‘수리비’이다.
“정원 14년(798) 4월13일 청제를 수리하고 기록…청제의 둑이 상했다는 보고에 따라 소내사(중앙 관리)에게 살피라고 구두로 지시…(수리한) 아랫변의 길이는 35보, 둑에서 수직 아래로 깊이는 6보3척, 상배굴리는 12보…2월12일 시작하여 4월13일 수리 완료했다. 도끼를 다루는 자는 모두 136명, 동원된 인원은 모두 1만4140명…전대등(왕실 기밀업무를 담당한 집사부 차관)이 절화군과 압량군에서 각각 100인을 부리게 함…공사 책임자는 소내사….”
그로부터 890년 후인 1688년(숙종 14) 두동강 난 채 매몰된 ‘청제비’를 다시 세운다. 조정은 그 기념으로 비석(중립비)을 세운다.
“영천 남쪽에 청제가 있고, 그 북쪽에 비석이 있는데…이 제방은 300여 석 지기에 관개(물을 댐)…지금까지 이익을 얻고 있음…계사(1653) 비석이 훼손되어 티끌 속에 매몰…고적을 알 수 없어 애석…이제 다시 비석을 세워 기록하니….”
■청제는 왕실소유 저수지?
‘건립비’와 ‘수리비’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청제 건립 및 수리 공사를 신라 중앙정부가 주도했다는 것이다.
‘건립비(536)’를 보면 공사책임자(사인·使人)는 대사·소사·대오·소오 등 중앙관리가 맡았다. ‘수리비(798)’에는 왕명을 받은 ‘소내사’가 저수지 제방 상태를 살피고 공사도 진두지휘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중 ‘소내(所內)’는 ‘왕실 직속 혹은 직할’의 의미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하일식 연세대 교수)
이와 관련해서 <삼국사기> ‘문무왕’조가 눈에 띈다. 669년 문무왕은 삼국통일 기념으로 전국의 말목장 174곳을 나눠줬다.
<삼국사기>는 이 기사를 전하면서 김유신(6곳)과 김인문(5곳) 등 공신들에게는 ‘하사(賜)했다’고 한 반면, 소내(所內·22곳)와 관청(10곳)에는 ‘소속시켰다(속·屬)’고 표현했다. 게다가 ‘소내’는 가장 먼저 언급되어 있다. 통일의 일등공신인 김유신(6곳)보다 4배 가까이, 그리고 관청(10곳)보다도 2배 이상 말 목장을 배속받았고(하사가 아니고), 가장 먼저 언급된 ‘소내’는 왕실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정리하면 ‘왕실이 파견한 관리인 ‘소내사’가 파손의 상태를 살피고 공사책임까지 맡았고, ‘전대등(왕실의 기밀업무를 담당하는 집사부 차관)’이 공사인원을 차출해서 수리한 청제는 ‘왕실 소유의 직할지’였을 가능성이 짙다.
아마 중앙정부 파견자 5명이 축조공사를 맡은 대오(大塢·대규모 저수지) 시절에도 역시 왕실 직할지였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초축 후 어느 순간인지는 몰라도 청제라는 이름을 얻었고…. 그렇기에 7000여 명(초축)~1만4000여명(수리)이라는 대규모 인원이 투입되었을 것이다.
■‘배굴리=빼구리’
명문 내용 중 ‘수리비(798)’에 등장하는 ‘상배굴리’라는 용어가 눈길을 끈다. ‘~상배굴리(上排堀里) 12보를 수리했다’는 내용이다.
‘배굴리’는 저수지 물을 빼내 논에 대는 목통(혹은 수통)을 가리킨다. 그 형태는 후대의 기록인 <태조실록> 1395년 7월30일자에 나와 있다.
“수구(水口)에 돌로 도랑을 만들어 그 위를 쌓게 하고…도랑 안쪽에 나무통을 세우고 나무통 안쪽 3~5개 구멍을 만들어 물의 높낮이를 따라 통하거나 막히게 하며, 도랑 바깥으로는 나무통을 두되 두 끝을 비워 두고, 그 밑으로는 좌우로 물을 내려서 끌어가도록 하고….”
그런데 지금도 영천 사람들은 ‘빼구리’라 한다. 신라인들이 목통이나 수통이라는 한자 대신 ‘빼구리’라는 순수 우리말을 ‘배굴리(排堀里)’라는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청제에는 상·(중)·하 배굴리가 존재했고, 798년 손상된 상배굴리를 수리했을 것이다. ‘배굴리=빼구리’는 무려 1200년 넘게 이어진 표현인 셈이다. 청제비문은 이외에도 ‘이와같이 하기를’의 뜻인 ‘차여위(此如爲)’라는 한국식 한문을 썼고, ‘사이에=간중(間中)’이라는 이두식 표현도 사용했다.
■무넘기=536년 초축 흔적
‘건립비(536)’에는 초축 당시의 제방 규모를 언급하고 있다. 즉 ‘둑 아랫부분 길이(홍·弘)=61심, 윗부분 길이(등·鄧)=92심, 바닥 너비(택광·澤光)=32심, 높이(고·高)=8심, 윗부분 너비(上·상)=3심’이라 했다. 당시 삼국의 기준척은 중국 남조척(1척 25㎝)이었고, 1심=8척(양팔 벌린 길이)으로 계산했다.
그렇다면 ‘둑 아랫부분(61심)=122m, 윗부분(92심)=184m, 바닥부분 너비(32심)=65m, 높이(8심)=16m, 윗부분 너비(3심)=6m’로 계산된다.
최근의 지표조사(세종문화유산재단) 결과 현재의 무넘기(여수로·餘水路) 남쪽에 예전에 조성된 무넘기의 흔적이 확인되었다.(진성섭 세종문화유산재단원장) ‘무넘기’는 물이 넘치지 않게 일정 수위에 찼을 때 흘려보내는 수로를 가리킨다. 주로 저수지의 옆 쪽에 조성한다.
그런데 지표조사에서 확인된 옛 무넘기 간의 길이를 합산해보면 193m로 측정된다. 이 길이는 ‘청제 건립비(병진명)’의 둑 윗부분(184m)과 엇비슷하다. 따라서 최근 확인된 무넘기 흔적이 바로 536년 초축된 대오(청제의 옛 용어)의 부속 시설으로 추정된다.(김재홍 국립중앙박물관장)
■농사는 천하의 근본
신라는 왜 7000~1만4000명이라는 대규모 인원을 투입해가며 물을 조절하는 제방을 축조했을까.
자그만치 1900년 전인 144년(일성왕 11) 2월로 돌아가보자. 일성왕은 “농사는 정치의 근본이며,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여긴다”면서 “전국에 제방을 수리·완성하고 농토를 개척하라”는 명을 내렸다. 최초의 저수지 축조 기사이다.
이후 진한 12국의 통합으로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를 얻게 된 신라는 자연히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5세기 들어 주작물이었던 맥류(보리·귀리 등)가 줄고 벼농사가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벼를 재배하면 밭에서 잡곡을 경작하는 것보다 2배 이상 수확할 수 있었다.
따라서 논의 확대는 농업생산성의 증대와 직결됐다. 신라인들은 물을 대서 벼를 심는 ‘수전(水田)’ 용어를 한글자로 줄인 ‘답(畓)’으로 쓸만큼 애착을 보였다. 561년 건립된 창녕 척경비는 굳이 논(畓)과 밭(田)으로 구별하여 ‘전답(田畓)’으로 표기할 정도였다.
“429년(눌지왕 13) 길이가 2170보인 시제(제방 이름·위치 미상)를 새로 쌓았다”(<삼국사기>)는 기록도 보인다.
또 의미심장한 <삼국사기> 기사가 502년(지증왕 3) 3월에 나타난다. “지증왕이 전국에 농사를 권장하고 소를 부려 논밭을 갈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경(牛耕)의 전국적인 확대를 일컫는다. ‘우경’으로 노동력을 크게 줄이고, ‘깊이갈이’로 병충해와 잡초를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었다.
단위면적당 수확량의 증대도 꾀할 수 있었다. 논농사의 효율성을 위해 저수지 축조는 국가적인 토목사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홍수기록과 저수지 축조의 상관
여기에 간과할 수 없는 착안점이 있다. <삼국사기> 기록과 ‘청제 건립비(536)’ 및 ‘청제 수리비(798)’, ‘무술 오작비’(578) 등을 맞춰보자.
<삼국사기>에 따르면 5세기 13차례의 홍수(7차례)와 가뭄(6차례)에 직면했다.
그러자 531년(법흥왕 18)에 전국적인 제방 수리(축조)에 나섰고(<삼국사기>, 그것이 영천 청제 건립(536) 등으로 구현되었다. 이 무렵 신라는 오작비(578·진지왕 3)까지 축조했고, 이후 밀양 구위양지, 상주 공검지, 울산 약사동 등 저수지 건설로 이어진다.
이 덕분일까. 6~7세기 사이 자연재해는 눈에 띄게 줄어 200년간 10회(홍수 3차례, 가뭄 7차례)에 그친다.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한 저수지 축조 사업이 효과를 얻은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김재홍 관장)
그러나 8~9세기 들어 가뭄(8세기 15차례, 9세기 12차례)과 홍수(8세기 4차례, 9세기 4차례)가 갑자기 늘어난다.
아마도 6~7세기에 축조·보수한 제방과 저수지가 낡아 제 기능을 못한 것일까. 798년 무려 1만4000여명이 동원된 청제의 수리가 저간의 사정을 웅변해준다.
<삼국사기>에도 8~9세기 저수지와 제방 축조 기사가 줄을 잇는다. 청제 축조 8년 전인 790년(원성왕 6) “전주 등 7주 백성들을 징발해서 김제 벽골제를 증축했다”는 기사가 우선 보인다. 청제 수축 못지않게 대규모 인력이 동원된 대규모 토목공사였을 것이다.
810년(헌덕왕 2)과 859년(헌안왕 3)에도 제방의 수리 기사가 보인다. 역시 6세기 이후 일제히 축조된 제방을 수리하는 조치였을 것이다.
이후 10세기 들어 자연재해 기사는 단 2차례 등장한다. 정리하자면 홍수와 가뭄이 빈번했던 시기는 5세기와, 8~9세기였다. 반면 적게 발생했던 시기는 제방과 저수지가 축조되거나 직후인 6~7세기와 10세기였다. 이것이 우연인가 필연인가.
최근 그간 보물로 지정되어 있던 영천 청제비가 국보로 승격예고됐다. ‘건립비와 수리비’, 그리고 ‘중립비’ 등 2건으로 구성된 ‘청제비’에는 물 관리로 자연재해를 극복하려던 선조들의 분투가 글자 글자마다 담겨있다. 새삼 중립비문에 새긴 ‘비석을 다시 일으켜 세운 이유’가 귀에 쟁쟁하다. “이제 비석을 다시 세워 기록하니 아! 후손들이 이 비석 덕분에 제방이 무너지지 않게 된다면…비석이 제방에 큰 도움이 되리라.” (이 기사를 위해 김재홍 국립중앙박물관장, 하일식 연세대 교수, 진성섭 세종문화유산재단 원장, 정인성 영남대 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참고자료>
김재홍, ‘영천 청제비의 종합적인 분석’, <동아시아 농업 토목공사 문화유산 청제와 청제비>(국제 학술대회),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2023
노중국,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본 영천 청제와 청제비-그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 <동아시아 농업 토목공사 문화유산 청제와 청제비>(국제 학술대회),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2023
이기백, ‘영천 청제비 정원명의 고찰’, <미술사학연구> 102권 102호, 한국미술사학회 1969
이기백, ‘영천 청제비의 병진명’, <미술사학연구> 106권 107호 한국미술사학회, 1970
이미란, ‘영천 청제비 병진명으로 본 신라 중고기 오(塢)의 축조와 그 운영’, <신라문화> 64권,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24
임창순, ‘대구에서 신발견된 무술오작비 소고’, <사학연구> 1호, 한국사학회, 1958
정영호, ‘영천 청제비의 발견’, <미술사학연구>, 한국미술사학회, 1969
진성섭, ‘영천 청제비의 구조와 의미’, <동아시아 농업 토목공사 문화유산 청제와 청제비>(국제 학술대회),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2023
하일식, ‘신라 왕실 직할지의 초기 형태에 대하여’, <동방학지> 132권, 연세대 국학연구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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