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피아]외국인이 일자리 뺏는다?…정치인들이 선후관계 왜곡하며 갈등 부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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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주임 작성일 25-06-16 21:21 조회 1회 댓글 0건본문
1960년대 파독 광부·간호사처럼 노동력 수요가 ‘먼저’ 그다음에 이주민들 유입정치권·언론, 사실보다 ‘의견·희망사항’ 다루며 내국인 대 이주민 구도 부추겨임금 낮아진 기피 업종, 이주민들로 메웠는데 ‘저임금 외국인’ 때문에 삭감 주장“고용불안정 진짜 이유는 정책 때문”…노동 대하는 기업·정부 태도부터 바꿔야
최근 미국의 농장들에선 일할 사람이 없어서 아우성이라고 합니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연일 강도 높은 불법 이민자 추방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기 때문인데요.
이는 이주민 문제와 관련해 현재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극우들이 외치는 주장의 현실 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주민들이 ‘우리’의 먹거리, 학교, 일자리를 빼앗고 있으니 이들을 쫓아내야 한다는 것이죠. “너희 나라로 돌아가!”는 이미 외국인 5%의 시대에 들어선 우리나라에서도 이주노동자 처우 관련 뉴스가 뜰 때마다 달리는 댓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트럼프의 ‘울타리 작전’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 있고요. 이에 최근 미국에선 ‘TACO(Trump Always Chickens Out·트럼프는 항상 겁먹고 물러선다)’라는 신조어가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합니다.
애초에 조금만 진지하게 생각해보아도, 요새 같은 세계화 시대에 “외국인을 몽땅 내쫓으면 우리는 예전처럼 잘살게 될 거야!”라는 말은 그야말로 엉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 기반한 해법이라기보단 희망사항에 가깝고요.
다만, 이런 기사들을 계속 읽다 보니 저는 그보다는 좀 다른 부분이 신경 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트럼프처럼 “외국인 아웃(OUT)”을 외치는 극우파들이 전 세계적으로 크게 번성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너희 나라로 돌아가!”는 매력적으로 들리는 걸까요? 그들이 이주민 아웃을 외치는 건 순전히 그들이 태생부터 혐오자이기 때문일까요? 이주민을 배척하는 것이 진정 그들이 걱정하는 ‘진짜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요? 오히려 트럼프 미국의 경우처럼, 상황을 악화시키게 되는 건 아닐까요? 진짜 문제는 이주민이 아닌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번 편지에서는, 오늘날 세계적으로 범위를 넓혀가는 극우의 이주민 혐오 현상에 대해 해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개탄할 만한, 뻔뻔한 혐오자들!”
오늘날 극우의 가장 큰 특징은 외국인 등 외부자에 대한 혐오를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극우파 정치인들은 심지어 일부 국가들에서 유의미한 표를 얻어 의회정치에까지 대대적으로 진출하고 있고요. 특히 젊은층, 노동계층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고 합니다. 대체 왜 이런 움직임이 늘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영국에서 20년 넘게 살며, 빈민가 어린이집 등에서 일해온 일본 출신 작가 브래디 미카코는 그간 주로 영국 빈민층의 삶과 관련한 글을 써왔는데요.
그가 2010년부터 2018년쯤까지 쓴 칼럼을 모은 <밑바닥에서 전합니다!>는 장기불황 및 복지 삭감 속에서 영국 하층민들이 극도의 어려움에 빠졌던 시기의 일상 풍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즉, <밑바닥에서 전합니다!>는 2020년 브렉시트 직전 영국 밑바닥 계층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잘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만하죠.
이 책의 책장을 넘기는 내내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일단, 오늘날 많은 노동계층 사람들이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 자체는 결코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동시에 누구로부터도 이해받지 못하고 있기도 하죠. 오히려 소외, 혐오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어느 날 브래디 미카코는 18개월 된 아기와 함께 영국 빈민가의 공원을 걷다가 한 무리의 ‘후드 쓴 불량소년’들과 맞닥뜨리고 쇠사슬로 위협을 당합니다. 기껏해야 열두 살 남짓 되어 보이는 꼬마들이었다고 하는데요. 그리고 “니하오, 니하오”라는 인종차별 혐오발언을 듣습니다. 아이가 위험에 빠질까봐 아찔해진 그는, 대꾸도 하지 못한 채 황급하게 아이를 데리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대목을 읽다 보니, 저는 이 혐오발언 사건 자체보다도 브래디 미카코가 그것에 대응하는 태도가 더 인상 깊었습니다.
사건 이후 그를 위로하기 위해 이웃 등 주변 사람들은 “신경 쓰지 마, 무시해. 그 애들은 쓰레기야”라는 식으로 다독였지만, 정작 욕을 들은 저자 본인은 - 진심으로 후드 쓴 소년들에게 모종의 안타까움, 연민, 씁쓸함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정말로 빈민가 불량소년들의 머릿속에 격변이 일어났을까 (…) 무언가 즐거운 일이나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으면 자포자기해서 난동 부릴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물론 혐오발언은 나쁩니다. 하지만 저자는 궁금해합니다. 과연 이들이 단지 내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특권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 많은 하층민들은 돈뿐만 아니라 자신을 대변한다고 느끼는 대중문화, 안정된 일자리, 소속감을 얻을 공동체와 장소, 문화적 의례, 사회적 관계, 삶의 보람 등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2016년 미국 대선 유세 과정에서 대선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이 “이주민 아웃”을 외치는 트럼프 지지자들을 ‘개탄스러운 존재들(Deplorables)’이라고 불러 논란이 되었던 일이 떠오르기도 했는데요. 트럼프 지지자들은 ‘혐오자’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일자리와 희망, 사회적 관계 등을 잃고, 주류 정치로부터도 외면받아 가장 큰 절망 속에 빠져 있던 무력한 노동계층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들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정말로 깡그리 무시해버려도 좋을, 이해와 연민의 여지가 전혀 없는 극악무도한 혐오자들에 불과한 존재일까요?
더 나은 삶, 가치를 추구하는 삶도 어느 정도는 여유가 있어야 하지만, 오늘날 많은 이들은 미래에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책 속 영국의 노동계층들은, 하층민 대상의 복지가 줄고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지면서 복지관에서 제공하는 무료 강좌에도 더 이상 나갈 수 없게 됩니다. 먹고사느라 바쁜데 무슨 미래고 교양이냐는 거죠. 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은 사치가 되었습니다.
다만, 책을 읽어가다 보니 과연 이것이 ‘일부 극소수 극단적인 하층민’만의 문제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후드 쓴 소년’들뿐 아니라, 그의 친한 이웃, 동료들 가운데서도 하나둘씩 영국 독립당의 논리에 수긍하며 직간접적으로 이주민에 대한 적대감을 나타내는 이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는, 어느 날 브래디 미카코가 근무하는 빈민가 어린이집에서 교사들끼리 ‘워크숍’을 하는 장면이었는데요. 교사들은 각자 이주민 혐오자 학부모들 역할을 맡아 이주민에 대한 혐오발언을 쏟아놓는데, 처음엔 ‘연기’였던 대화가 점차 진심과 연기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됩니다. “애초에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영국에 살면 안 되는 거 아냐?” “이주민의 아이들한테는 돈이 많이 들어…”
저는 이런 대목을 읽으며, 어쩌면 외국인에 대한 배척은 ‘극소수의 후드 쓴 소년들’만의 감정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엔 꼭 하층민뿐 아니라 아주 많은 사람이 질병, 고립, AI 기술 발달로 인한 대량실업으로 언제든 낙오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리고 이런 생각에 내심 불안해지는 것은, 엄청난 자산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특히나 오늘날처럼 대부분의 사람이 - 심지어 중산층마저, ‘작은 삐끗’만으로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질 수 있는 세상에서는요.
불안감을 느끼는 것 자체는 당연합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진짜 물어야 하는 것은, 과연 외국인 ‘때문에’ 우리가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서 응당 누구나 품을 수 있는 불안감이 어째서 왜곡된 방향으로 흐르게 되는지일 것입니다.
문제는 이민인가?
이처럼 오늘날 하층민은 경제적인 부분뿐 아니라 소속감, 문화, 친밀한 관계 등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고요, 중산층 역시 불안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핵심부터 말하자면 그 모든 문제의 주된 이유는 ‘이주민의 탓’이 아닙니다. 심지어 많은 경우 ‘이주민 vs 내국인’의 문제조차 아닙니다.
30년 넘게 이민 관련 연구를 해온, 세계적인 전문가 헤인 데 하스는 <이주, 국가를 선택하는 사람들>에서 ‘우리가 오늘날 이민과 관련해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 치명적인 오해다!’라고 외칩니다.
그는 그간 대부분의 언론, 정치권에서 이주 문제는 현실, 연구와 동떨어진 채 철저히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다루어져왔다고 말하는데요. 그는 “사실 최근 진행되는 이주 논의는 대부분 논의라고 할 수도 없다”며 “사실보다는 의견이나 희망사항에 모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라고 말하기까지 하죠.
우선, 이 책에 소개된 오해들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논리 두 가지와 그에 대한 반박을 꼽아보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ㄱ. 수요가 먼저다! : 사람들은 흔히 일방적으로 ‘이주민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내국인의 일자리를 뺏는다!’는 식으로 생각하곤 하는데요.
하인 데 하스는 고개를 젓습니다. 대부분의 이주는, 반대로 대상 국가에 먼저 ‘노동력 수요’가 존재하고, 그다음에 이주민이 들어왔다는 거죠.
이는 과거 우리나라로부터의 이주 경우도 마찬가지인데요. 대표적 사례는 1960년대의 파독 광부·간호사 등이 있죠. 이 경우도 먼저 해당 지역의 일자리 부족이 문제가 되었고, 이에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가서 빈자리를 메워주는 형식이었습니다. 또한 저자는 역사적으로, 편견과는 달리 이주노동으로부터 내국인이 훨씬 큰 이득을 얻어왔다고 합니다. 별도로 돈과 시간을 들여 교육할 필요가 없고, ‘젊고 건강한’ 노동력이 필요한 자리에 유연하게 이들을 동원하고, 자국민이 선호하지 않는 필수 일자리를 저렴한 인건비로 손쉽게 채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주노동자들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갑자기 현지에서 ‘내쫓아야 할 골칫덩이’ ‘내국인 일자리를 빼앗는 사람’ 취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ㄴ. 나쁜 확성기 효과 : 오늘날 극우정치인들은 “역대급으로 외국인이 몰려들어온다!”고 소리칩니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봤을 때, 이주는 오히려 과거에 훨씬 많았고 비교적 안정된 수준에서 유지되고 있는 편이며, 최근 갑자기 늘어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단적으로, 19세기 제국주의 시대 전후만 해도 더 나은 삶을 위해 ‘이주’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물결이 유럽으로부터 각 대륙으로 뻗어나갔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주가 엄청나게 큰 문제인 것처럼 느껴지는 데는, 정치인의 ‘혐오 선동’과 함께 극우에 대한 미디어의 과도한 주목 효과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정치인, 극우단체 등의 극단적인 혐오발언, 선동 등은 일단 관심경제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끄니까요.
오히려,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 일상에서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이주민에 대해 극단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지는 않다고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주가 많지 않은 지역에서의 반대 의견이 높았고, 이주민들과 어울려 사는 경우엔, 실제 어울리며 편견도 어느 정도 사라지고 이들이 노동자이자 소비자로서 쇠락한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긍정적인 반응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외국인 비율이 두 번째로 높은 충북 음성군(약 18.1%·2025년 1월 기준)에서는 주변 상권의 매출 약 40%가 이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이주노동자 없이는 경제 망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죠.
그럼에도 계속 사람들의 ‘이주민과 관련된 체감 갈등’이 늘어나는 이유는, 이를 정치권과 언론 등이 조장한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자뺏기 싸움인가?
헤인 데 하스는,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이주와 관련된 현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팁을 줍니다. 핵심은, ‘이주노동’에서 중요한 것은 ‘이주’보다 ‘노동’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간 정치권은 이주노동에서 ‘이주’만 강조하는 방식으로 약자 대 약자의 싸움 구도를 조성해왔다는 것이죠.
임금이 낮아진 건, 임금을 낮췄기 때문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설령 실제로 이주민이 들어온 업계에서 임금이 내려간 경우에도, 그 이유는 이주민이 들어왔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후관계가 뒤바뀌어, 먼저 ‘업계의 임금이 떨어졌’기 때문에 ‘이주민이 들어오는’ 게 대부분이었죠. 예를 들면 과거 미국의 정육업계가 임금 삭감과 함께 시골로 공장을 이전했고, 그 결과 토박이 노동자들이 정육업계 일자리를 기피하고 그 자리를 이주자들이 메우는 식입니다.
저자는 고용불안정 등 문제가 발생한 “진짜 이유는 이입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선택한 정책 때문”이라며 “정치인들은 저임금 경제가 이입민이 아니라 자신들의 책임이라는 사실에서 주의를 돌리려고 이입을 이런 문제들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이어, 결과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업과 정부가 ‘노동’을 대하는 태도이며 - 이를 바꿔야지만 저임금 노동자들의 삶이 실제로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헤인 데 하스는 “정치인들은 이입에 반대한다는 수사를 구사하며 이입이 모든 문제의 원인인 것처럼 암시해 토박이 노동자와 이주노동자를 이간하려 든다”며, 하지만 이는 “토박이 노동자와 이주노동자가 ‘노동자’로서 공동의 이익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숨기려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결국 ‘누구의 노동’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사회가 ‘노동의 가치’를 어떻게 다루냐의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 ‘노동’에 대해 말하는 대신 ‘이주’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결코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맺음말
트럼프 미국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 레터가, 마지막엔 노동 전반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되었습니다.
이번 레터에서 살펴본 대로, 결국 우리가 오늘날 처한 상황을 ‘진짜로’ 더 낫게 만들기 위해서는 본질적인 노동조건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이 막막한 현실에서, 결코 이주노동자의 권리와 나의 권리는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적대보다는 피차 팍팍한 동시대의 현실을 헤쳐가는 서로에 대한 연민을 바탕으로 - 진짜 문제에 신중하게 귀를 기울여가다 보면 한 발짝이라도 더 나은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다 보면, 어쩌면 우리가 ‘혐오자’라고 불러왔던 이들도 언젠가는 고개를 돌려, 같은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최근 미국의 농장들에선 일할 사람이 없어서 아우성이라고 합니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연일 강도 높은 불법 이민자 추방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기 때문인데요.
이는 이주민 문제와 관련해 현재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극우들이 외치는 주장의 현실 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주민들이 ‘우리’의 먹거리, 학교, 일자리를 빼앗고 있으니 이들을 쫓아내야 한다는 것이죠. “너희 나라로 돌아가!”는 이미 외국인 5%의 시대에 들어선 우리나라에서도 이주노동자 처우 관련 뉴스가 뜰 때마다 달리는 댓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트럼프의 ‘울타리 작전’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 있고요. 이에 최근 미국에선 ‘TACO(Trump Always Chickens Out·트럼프는 항상 겁먹고 물러선다)’라는 신조어가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합니다.
애초에 조금만 진지하게 생각해보아도, 요새 같은 세계화 시대에 “외국인을 몽땅 내쫓으면 우리는 예전처럼 잘살게 될 거야!”라는 말은 그야말로 엉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 기반한 해법이라기보단 희망사항에 가깝고요.
다만, 이런 기사들을 계속 읽다 보니 저는 그보다는 좀 다른 부분이 신경 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트럼프처럼 “외국인 아웃(OUT)”을 외치는 극우파들이 전 세계적으로 크게 번성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너희 나라로 돌아가!”는 매력적으로 들리는 걸까요? 그들이 이주민 아웃을 외치는 건 순전히 그들이 태생부터 혐오자이기 때문일까요? 이주민을 배척하는 것이 진정 그들이 걱정하는 ‘진짜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요? 오히려 트럼프 미국의 경우처럼, 상황을 악화시키게 되는 건 아닐까요? 진짜 문제는 이주민이 아닌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번 편지에서는, 오늘날 세계적으로 범위를 넓혀가는 극우의 이주민 혐오 현상에 대해 해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개탄할 만한, 뻔뻔한 혐오자들!”
오늘날 극우의 가장 큰 특징은 외국인 등 외부자에 대한 혐오를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극우파 정치인들은 심지어 일부 국가들에서 유의미한 표를 얻어 의회정치에까지 대대적으로 진출하고 있고요. 특히 젊은층, 노동계층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고 합니다. 대체 왜 이런 움직임이 늘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영국에서 20년 넘게 살며, 빈민가 어린이집 등에서 일해온 일본 출신 작가 브래디 미카코는 그간 주로 영국 빈민층의 삶과 관련한 글을 써왔는데요.
그가 2010년부터 2018년쯤까지 쓴 칼럼을 모은 <밑바닥에서 전합니다!>는 장기불황 및 복지 삭감 속에서 영국 하층민들이 극도의 어려움에 빠졌던 시기의 일상 풍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즉, <밑바닥에서 전합니다!>는 2020년 브렉시트 직전 영국 밑바닥 계층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잘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만하죠.
이 책의 책장을 넘기는 내내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일단, 오늘날 많은 노동계층 사람들이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 자체는 결코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동시에 누구로부터도 이해받지 못하고 있기도 하죠. 오히려 소외, 혐오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어느 날 브래디 미카코는 18개월 된 아기와 함께 영국 빈민가의 공원을 걷다가 한 무리의 ‘후드 쓴 불량소년’들과 맞닥뜨리고 쇠사슬로 위협을 당합니다. 기껏해야 열두 살 남짓 되어 보이는 꼬마들이었다고 하는데요. 그리고 “니하오, 니하오”라는 인종차별 혐오발언을 듣습니다. 아이가 위험에 빠질까봐 아찔해진 그는, 대꾸도 하지 못한 채 황급하게 아이를 데리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대목을 읽다 보니, 저는 이 혐오발언 사건 자체보다도 브래디 미카코가 그것에 대응하는 태도가 더 인상 깊었습니다.
사건 이후 그를 위로하기 위해 이웃 등 주변 사람들은 “신경 쓰지 마, 무시해. 그 애들은 쓰레기야”라는 식으로 다독였지만, 정작 욕을 들은 저자 본인은 - 진심으로 후드 쓴 소년들에게 모종의 안타까움, 연민, 씁쓸함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정말로 빈민가 불량소년들의 머릿속에 격변이 일어났을까 (…) 무언가 즐거운 일이나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으면 자포자기해서 난동 부릴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물론 혐오발언은 나쁩니다. 하지만 저자는 궁금해합니다. 과연 이들이 단지 내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특권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 많은 하층민들은 돈뿐만 아니라 자신을 대변한다고 느끼는 대중문화, 안정된 일자리, 소속감을 얻을 공동체와 장소, 문화적 의례, 사회적 관계, 삶의 보람 등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2016년 미국 대선 유세 과정에서 대선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이 “이주민 아웃”을 외치는 트럼프 지지자들을 ‘개탄스러운 존재들(Deplorables)’이라고 불러 논란이 되었던 일이 떠오르기도 했는데요. 트럼프 지지자들은 ‘혐오자’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일자리와 희망, 사회적 관계 등을 잃고, 주류 정치로부터도 외면받아 가장 큰 절망 속에 빠져 있던 무력한 노동계층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들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정말로 깡그리 무시해버려도 좋을, 이해와 연민의 여지가 전혀 없는 극악무도한 혐오자들에 불과한 존재일까요?
더 나은 삶, 가치를 추구하는 삶도 어느 정도는 여유가 있어야 하지만, 오늘날 많은 이들은 미래에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책 속 영국의 노동계층들은, 하층민 대상의 복지가 줄고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지면서 복지관에서 제공하는 무료 강좌에도 더 이상 나갈 수 없게 됩니다. 먹고사느라 바쁜데 무슨 미래고 교양이냐는 거죠. 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은 사치가 되었습니다.
다만, 책을 읽어가다 보니 과연 이것이 ‘일부 극소수 극단적인 하층민’만의 문제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후드 쓴 소년’들뿐 아니라, 그의 친한 이웃, 동료들 가운데서도 하나둘씩 영국 독립당의 논리에 수긍하며 직간접적으로 이주민에 대한 적대감을 나타내는 이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는, 어느 날 브래디 미카코가 근무하는 빈민가 어린이집에서 교사들끼리 ‘워크숍’을 하는 장면이었는데요. 교사들은 각자 이주민 혐오자 학부모들 역할을 맡아 이주민에 대한 혐오발언을 쏟아놓는데, 처음엔 ‘연기’였던 대화가 점차 진심과 연기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됩니다. “애초에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영국에 살면 안 되는 거 아냐?” “이주민의 아이들한테는 돈이 많이 들어…”
저는 이런 대목을 읽으며, 어쩌면 외국인에 대한 배척은 ‘극소수의 후드 쓴 소년들’만의 감정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엔 꼭 하층민뿐 아니라 아주 많은 사람이 질병, 고립, AI 기술 발달로 인한 대량실업으로 언제든 낙오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리고 이런 생각에 내심 불안해지는 것은, 엄청난 자산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특히나 오늘날처럼 대부분의 사람이 - 심지어 중산층마저, ‘작은 삐끗’만으로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질 수 있는 세상에서는요.
불안감을 느끼는 것 자체는 당연합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진짜 물어야 하는 것은, 과연 외국인 ‘때문에’ 우리가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서 응당 누구나 품을 수 있는 불안감이 어째서 왜곡된 방향으로 흐르게 되는지일 것입니다.
문제는 이민인가?
이처럼 오늘날 하층민은 경제적인 부분뿐 아니라 소속감, 문화, 친밀한 관계 등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고요, 중산층 역시 불안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핵심부터 말하자면 그 모든 문제의 주된 이유는 ‘이주민의 탓’이 아닙니다. 심지어 많은 경우 ‘이주민 vs 내국인’의 문제조차 아닙니다.
30년 넘게 이민 관련 연구를 해온, 세계적인 전문가 헤인 데 하스는 <이주, 국가를 선택하는 사람들>에서 ‘우리가 오늘날 이민과 관련해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 치명적인 오해다!’라고 외칩니다.
그는 그간 대부분의 언론, 정치권에서 이주 문제는 현실, 연구와 동떨어진 채 철저히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다루어져왔다고 말하는데요. 그는 “사실 최근 진행되는 이주 논의는 대부분 논의라고 할 수도 없다”며 “사실보다는 의견이나 희망사항에 모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라고 말하기까지 하죠.
우선, 이 책에 소개된 오해들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논리 두 가지와 그에 대한 반박을 꼽아보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ㄱ. 수요가 먼저다! : 사람들은 흔히 일방적으로 ‘이주민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내국인의 일자리를 뺏는다!’는 식으로 생각하곤 하는데요.
하인 데 하스는 고개를 젓습니다. 대부분의 이주는, 반대로 대상 국가에 먼저 ‘노동력 수요’가 존재하고, 그다음에 이주민이 들어왔다는 거죠.
이는 과거 우리나라로부터의 이주 경우도 마찬가지인데요. 대표적 사례는 1960년대의 파독 광부·간호사 등이 있죠. 이 경우도 먼저 해당 지역의 일자리 부족이 문제가 되었고, 이에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가서 빈자리를 메워주는 형식이었습니다. 또한 저자는 역사적으로, 편견과는 달리 이주노동으로부터 내국인이 훨씬 큰 이득을 얻어왔다고 합니다. 별도로 돈과 시간을 들여 교육할 필요가 없고, ‘젊고 건강한’ 노동력이 필요한 자리에 유연하게 이들을 동원하고, 자국민이 선호하지 않는 필수 일자리를 저렴한 인건비로 손쉽게 채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주노동자들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갑자기 현지에서 ‘내쫓아야 할 골칫덩이’ ‘내국인 일자리를 빼앗는 사람’ 취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ㄴ. 나쁜 확성기 효과 : 오늘날 극우정치인들은 “역대급으로 외국인이 몰려들어온다!”고 소리칩니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봤을 때, 이주는 오히려 과거에 훨씬 많았고 비교적 안정된 수준에서 유지되고 있는 편이며, 최근 갑자기 늘어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단적으로, 19세기 제국주의 시대 전후만 해도 더 나은 삶을 위해 ‘이주’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물결이 유럽으로부터 각 대륙으로 뻗어나갔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주가 엄청나게 큰 문제인 것처럼 느껴지는 데는, 정치인의 ‘혐오 선동’과 함께 극우에 대한 미디어의 과도한 주목 효과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정치인, 극우단체 등의 극단적인 혐오발언, 선동 등은 일단 관심경제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끄니까요.
오히려,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 일상에서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이주민에 대해 극단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지는 않다고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주가 많지 않은 지역에서의 반대 의견이 높았고, 이주민들과 어울려 사는 경우엔, 실제 어울리며 편견도 어느 정도 사라지고 이들이 노동자이자 소비자로서 쇠락한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긍정적인 반응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외국인 비율이 두 번째로 높은 충북 음성군(약 18.1%·2025년 1월 기준)에서는 주변 상권의 매출 약 40%가 이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이주노동자 없이는 경제 망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죠.
그럼에도 계속 사람들의 ‘이주민과 관련된 체감 갈등’이 늘어나는 이유는, 이를 정치권과 언론 등이 조장한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자뺏기 싸움인가?
헤인 데 하스는,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이주와 관련된 현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팁을 줍니다. 핵심은, ‘이주노동’에서 중요한 것은 ‘이주’보다 ‘노동’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간 정치권은 이주노동에서 ‘이주’만 강조하는 방식으로 약자 대 약자의 싸움 구도를 조성해왔다는 것이죠.
임금이 낮아진 건, 임금을 낮췄기 때문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설령 실제로 이주민이 들어온 업계에서 임금이 내려간 경우에도, 그 이유는 이주민이 들어왔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후관계가 뒤바뀌어, 먼저 ‘업계의 임금이 떨어졌’기 때문에 ‘이주민이 들어오는’ 게 대부분이었죠. 예를 들면 과거 미국의 정육업계가 임금 삭감과 함께 시골로 공장을 이전했고, 그 결과 토박이 노동자들이 정육업계 일자리를 기피하고 그 자리를 이주자들이 메우는 식입니다.
저자는 고용불안정 등 문제가 발생한 “진짜 이유는 이입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선택한 정책 때문”이라며 “정치인들은 저임금 경제가 이입민이 아니라 자신들의 책임이라는 사실에서 주의를 돌리려고 이입을 이런 문제들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이어, 결과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업과 정부가 ‘노동’을 대하는 태도이며 - 이를 바꿔야지만 저임금 노동자들의 삶이 실제로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헤인 데 하스는 “정치인들은 이입에 반대한다는 수사를 구사하며 이입이 모든 문제의 원인인 것처럼 암시해 토박이 노동자와 이주노동자를 이간하려 든다”며, 하지만 이는 “토박이 노동자와 이주노동자가 ‘노동자’로서 공동의 이익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숨기려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결국 ‘누구의 노동’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사회가 ‘노동의 가치’를 어떻게 다루냐의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 ‘노동’에 대해 말하는 대신 ‘이주’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결코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맺음말
트럼프 미국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 레터가, 마지막엔 노동 전반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되었습니다.
이번 레터에서 살펴본 대로, 결국 우리가 오늘날 처한 상황을 ‘진짜로’ 더 낫게 만들기 위해서는 본질적인 노동조건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이 막막한 현실에서, 결코 이주노동자의 권리와 나의 권리는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적대보다는 피차 팍팍한 동시대의 현실을 헤쳐가는 서로에 대한 연민을 바탕으로 - 진짜 문제에 신중하게 귀를 기울여가다 보면 한 발짝이라도 더 나은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다 보면, 어쩌면 우리가 ‘혐오자’라고 불러왔던 이들도 언젠가는 고개를 돌려, 같은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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