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훈의 민주주의 시간]정치의 미덕
페이지 정보
작성자이주임 작성일 25-06-10 15:48 조회 0회 댓글 0건본문
이번 선거에서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는 의미 있는 역할을 했다. 다른 정당들이 외면하는 의제를 던졌고, 중하층 시민들의 요구를 대변했다. 자극과 흥분을 목적으로 말하지 않아서도 좋았다. 표는 적었지만, 포기는 없다는 듯 진보 정당의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 했다.
주류 정당들의 경쟁이었다면 어땠을까. 이재명, 김문수, 이준석의 싸움이 다였다면 괜찮았을까. 지난 대선처럼 ‘비호감 선거’라 욕만 했을까. 투표할 의욕을 내내 유지할 수 있었을까. 종류가 다른 정당이 있고 없고는 선거 과정의 정당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권 후보는 자칫 냉소로 끝날 선거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했고, 민주정체의 역량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평등의 가치 일깨운 권영국 후보
<법의 정신>의 저자 몽테스키외는 민주정체가 필요로 하는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평등에 대한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검소함에 대한 사랑”이다. 검소함과 질박함에 대한 사랑은 고대 아테네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장례 연설에서도 강조된 바 있다. 그에 비해 지금 우리 사회는 ‘성장 중독증’이라는 심각한 질병에 빠져 있다. 주류 정당은 모두 성장을 말하고, 마치 폭식이라도 시켜줄 듯 더 많은 돈을 안기겠다는 공약만 했다. 성장 국가가 아니라 성숙한 사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고 제안하는 사람은 없었다.
더 큰 문제는 평등에 대한 사랑을 이제 주류 정당들이 말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들 민주주의는 말하는데, 평등의 가치에 대해서는 고개를 돌린다. 크게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지만, 마치 우리에게 “더 성장하려면 불평등의 좋은 효과가 필요하다”고 속삭이는 듯하다.
몽테스키외 이야기를 다시 하자면, 그는 “명예에 대한 사랑”으로 움직이는 군주정체와 달리 “평등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민주정체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라 말한다. 중요한 것은 민주정체의 그런 힘은 오로지 “정치적 덕성”에 의해 발휘된다고 꼭 짚어 강조한 데 있다. 종교적 덕성이나 도덕적 덕성도 아닌, 오로지 정치적 덕성만이 평등한 변화를 만들 수 있고 공화국을 더 활기차게 만든다는 것이다. 더 강조하고 싶었던지 몽테스키외는 정치가를 가리켜 “정치적 덕인”이라는 표현을 추가했다.
정치의 미덕을 실천하는 정치인, ‘정치적 덕인’이 지금 우리 정치에 있을까. 선출직을 기준으로 하면 정치인이 없는 건 아니다. 지방의원을 포함해 5000여명의 선출된 시민 대표가 있다. 그런데 평등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정치적 덕인보다는, 자신만 더 주목받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권력 지향적 인물이 훨씬 더 많다. 기회를 잡을 수 있다면 여성혐오마저 무기로 삼는 이도 있다. 여성 후보도, 빈곤 문제도 이번처럼 외면된 선거가 또 있을까 싶다. 그 속에서도 불평등과 차별의 의제를 제기한 권 후보가 있어 좋았다.
가치·신념 다른 정치인 늘어나야
정치가 정치답고 정치가가 정치가다워야 좀 더 평등한 민주주의가 된다. 정치의 미덕을 상실한 민주주의, 다시 말해 정치 없는 민주주의에서는 가난하고 힘없는 시민들이 대변될 수 없다. 정치 없는 민주주의는 목소리 큰 시민들의 민주주의다. 만인의 평등한 권리가 아니라 권력을 둘러싼 극단적 싸움만 부추긴다.
정치는 혼자 할 수 없다. 여럿이 공유하는 활동이다. 한 사람만 자유로운 정치를 정치라 하는 사람은 없다.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존하고 협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정치다. 그런 정치가 되려면 민주주의는 다원주의의 발전과 나란히 전진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다원적이지 않다면, 정치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정치가 있어야 주위를 살피는 민주주의가 된다. 그런 민주주의에서만 소외된 의견이나 배제된 이익을 위해 일하는 정치가가 인정받을 수 있다.
정치가는 임시직이다. 주기적으로 주권을 위임받아야만 다시 일을 맡을 수 있다. 정치가는 가장 불안정한 직업이기에, 정치가들에게 필요한 보상을 안기는 것을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정치가들은 우리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한다. 그들은 온종일 대화하는 사람들이다. 매 순간 심리적 긴장과 갈등 속에서 감정을 소모하는 일을 한다. 일상적으로 시민과의 접촉면을 넓히고 지지자를 찾아 나서는 일이 즐거울 수만은 없다. 감정노동이 있다면 단연 정치가 최고다.
우리는 좋은 정당과 좋은 정치가의 수고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없다. 그들이 없다면 모든 사적 갈등을 직접 해결하는 힘든 삶을 살아야 한다. 그 길은 지옥이다. 정치와 정치가, 대표와 대의원의 역할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하는 시민이 민주주의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 정당 수는 늘어야 한다. 가치나 신념이 다른 개성 있는 정치가가 더 많아져야 한다. 양당 독과점 구조는 물론 혐오나 차별의 정치를 넘어서고자 한다면 또 다른 이준석이 아닌 더 많은 권영국이 필요하다.
주류 정당들의 경쟁이었다면 어땠을까. 이재명, 김문수, 이준석의 싸움이 다였다면 괜찮았을까. 지난 대선처럼 ‘비호감 선거’라 욕만 했을까. 투표할 의욕을 내내 유지할 수 있었을까. 종류가 다른 정당이 있고 없고는 선거 과정의 정당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권 후보는 자칫 냉소로 끝날 선거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했고, 민주정체의 역량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평등의 가치 일깨운 권영국 후보
<법의 정신>의 저자 몽테스키외는 민주정체가 필요로 하는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평등에 대한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검소함에 대한 사랑”이다. 검소함과 질박함에 대한 사랑은 고대 아테네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장례 연설에서도 강조된 바 있다. 그에 비해 지금 우리 사회는 ‘성장 중독증’이라는 심각한 질병에 빠져 있다. 주류 정당은 모두 성장을 말하고, 마치 폭식이라도 시켜줄 듯 더 많은 돈을 안기겠다는 공약만 했다. 성장 국가가 아니라 성숙한 사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고 제안하는 사람은 없었다.
더 큰 문제는 평등에 대한 사랑을 이제 주류 정당들이 말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들 민주주의는 말하는데, 평등의 가치에 대해서는 고개를 돌린다. 크게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지만, 마치 우리에게 “더 성장하려면 불평등의 좋은 효과가 필요하다”고 속삭이는 듯하다.
몽테스키외 이야기를 다시 하자면, 그는 “명예에 대한 사랑”으로 움직이는 군주정체와 달리 “평등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민주정체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라 말한다. 중요한 것은 민주정체의 그런 힘은 오로지 “정치적 덕성”에 의해 발휘된다고 꼭 짚어 강조한 데 있다. 종교적 덕성이나 도덕적 덕성도 아닌, 오로지 정치적 덕성만이 평등한 변화를 만들 수 있고 공화국을 더 활기차게 만든다는 것이다. 더 강조하고 싶었던지 몽테스키외는 정치가를 가리켜 “정치적 덕인”이라는 표현을 추가했다.
정치의 미덕을 실천하는 정치인, ‘정치적 덕인’이 지금 우리 정치에 있을까. 선출직을 기준으로 하면 정치인이 없는 건 아니다. 지방의원을 포함해 5000여명의 선출된 시민 대표가 있다. 그런데 평등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정치적 덕인보다는, 자신만 더 주목받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권력 지향적 인물이 훨씬 더 많다. 기회를 잡을 수 있다면 여성혐오마저 무기로 삼는 이도 있다. 여성 후보도, 빈곤 문제도 이번처럼 외면된 선거가 또 있을까 싶다. 그 속에서도 불평등과 차별의 의제를 제기한 권 후보가 있어 좋았다.
가치·신념 다른 정치인 늘어나야
정치가 정치답고 정치가가 정치가다워야 좀 더 평등한 민주주의가 된다. 정치의 미덕을 상실한 민주주의, 다시 말해 정치 없는 민주주의에서는 가난하고 힘없는 시민들이 대변될 수 없다. 정치 없는 민주주의는 목소리 큰 시민들의 민주주의다. 만인의 평등한 권리가 아니라 권력을 둘러싼 극단적 싸움만 부추긴다.
정치는 혼자 할 수 없다. 여럿이 공유하는 활동이다. 한 사람만 자유로운 정치를 정치라 하는 사람은 없다.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존하고 협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정치다. 그런 정치가 되려면 민주주의는 다원주의의 발전과 나란히 전진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다원적이지 않다면, 정치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정치가 있어야 주위를 살피는 민주주의가 된다. 그런 민주주의에서만 소외된 의견이나 배제된 이익을 위해 일하는 정치가가 인정받을 수 있다.
정치가는 임시직이다. 주기적으로 주권을 위임받아야만 다시 일을 맡을 수 있다. 정치가는 가장 불안정한 직업이기에, 정치가들에게 필요한 보상을 안기는 것을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정치가들은 우리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한다. 그들은 온종일 대화하는 사람들이다. 매 순간 심리적 긴장과 갈등 속에서 감정을 소모하는 일을 한다. 일상적으로 시민과의 접촉면을 넓히고 지지자를 찾아 나서는 일이 즐거울 수만은 없다. 감정노동이 있다면 단연 정치가 최고다.
우리는 좋은 정당과 좋은 정치가의 수고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없다. 그들이 없다면 모든 사적 갈등을 직접 해결하는 힘든 삶을 살아야 한다. 그 길은 지옥이다. 정치와 정치가, 대표와 대의원의 역할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하는 시민이 민주주의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 정당 수는 늘어야 한다. 가치나 신념이 다른 개성 있는 정치가가 더 많아져야 한다. 양당 독과점 구조는 물론 혐오나 차별의 정치를 넘어서고자 한다면 또 다른 이준석이 아닌 더 많은 권영국이 필요하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