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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송의 아니근데] ‘경쟁’도 ‘전쟁’도 아닌···우리에겐 더 나은 ‘논쟁’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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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주임 작성일 25-06-07 08:36 조회 3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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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이 발행되었을 때는 제 21대 대통령 선거가 끝났을 것이다. 지난 5월 27일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는 세 번째 TV 토론 ‘정치개혁과 개헌’ 주제 토론에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 발언을 전달하며 폭력적인 표현을 그대로 사용했다. 민주노동당 권영국 후보에게 “이것이 여성혐오인지 아닌지” 묻는 취지였다고 하나, 갈라치기의 혐오정치가 정체성인 이준석 후보가 갑자기 여성혐오 문제에 관심이 생겼다? 캐비닛이 삐끼삐끼를 출 소리다. 해당 발언은 명백하게 성폭력을 도구화하여 다른 후보를 비난하려는 목적이다. 당황한 권영국 후보는 직접적인 대답을 피했고 TV 토론을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갑작스러운 언어 성폭력에 노출되었다. 즉각 비판 여론이 일었고, 이준석 후보에 대한 징계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21대 대선 선거방송심의위언회(선방위)는 당초 이준석의 발언은 “방송사와 관련 없는 후보자 개인 발언”이라는 이유로 심의 대상이 아니라고 밝혔으나 이후 입장을 바꿔 대선 직후 심의 안건으로 상정했다. 이 사태는 단순히 문제적인 개인의 기행 혹은 말실수가 아니다. 대선후보로 출마한 정치인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폭력적인 표현을 사용할 만큼, 한국 사회에서 사이버 공론장과 토론의 실태를 보여주는 징후이다.
이준석 후보가 그런 말을 한 배경은 ‘토론을 지배하는 나’라는 도취다. 그는 핵심을 이탈하면서 상대의 말을 극단적으로 왜곡하고, 작은 부분을 부풀려 맥락 자체를 꼬는 화법을 구사해왔다. 그리고 상대가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히거나, 해명하려고 들면 꼬투리를 잡으며 ‘승리’로 받아들였다. 토론은 이기고 지는 전투가 아니라 논의와 상호작용의 행위건만,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상대를 제압하는 게임처럼 임한 것이다. 기본도 갖추지 못한 태도임에도, 20년 가까이 우려 먹고 있는 하버드 학벌의 후광과 그를 패널로 기용하여 무비판적인 멍석을 깔아준 방송국의 지원으로 말 잘하는 청년, 토론의 제왕(네?)으로 행세했다. 상대를 당황시킬 수 있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해서 우위를 점하려는 욕구가 방송에서 출처도 불분명한 언어 성폭력을 그대로 재현하기에 이른 것이다. 폭력의 재현이 과연 폭력을 고발할 수 있는가, 오히려 고발과 비판을 명분으로 폭력의 쾌락을 누리지 않는가 하는 문제는 문화예술계의 오랜 윤리적 주제이다. 하지만 이토록 저열한 방식에는 그 어떤 해석도 과분하다.
아무리 인간이 발언의 내용보다 태도와 말투를 기억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하더라도, 의기양양하게 쏘아붙이는 이준석과 당황한 상대의 그림이 인지도를 얻은 데에는 방송국의 책임이 크다. 비슷한 나이의 다른 청년 정치인에게 주어지는 기회와 비교해도 이준석 후보는 과도한 발언권을 얻었고, 방송에서는 공적 발언에 필요한 태도나 감수성을 다듬어주지 않았다. 그의 논지가 산으로 갈 때마다 사회자가 적재적소에 개입하여 토론의 흐름을 끊거나, 이탈한 논점을 돌리거나, 잘못된 논리를 바로잡았더라면 어땠을까? 대선토론 방송에서 충격적인 언어 성폭력이 자행되었을 때에도, 사회자나 방송국은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곧장 마이크를 끄거나, 부적절했다는 주의를 주거나, 잠시 방송을 중단하는 등 해당 발언이 문제적이라는 신호를 명확하게 주었어야 하는데 말이다. 결국 대통령씩이나 뽑는 규모가 크고 중요한 토론에서, 각 후보의 공약이나 비전보다 수준 떨어지는 비아냥과 난데없는 언어 성폭력이 더 주목받는 사달이 났다.
이처럼 상대의 말문을 막히게 하는 기술이 미디어 등에서 반복적으로 송출된 결과, 일상의 논쟁을 ‘팩트폭격’, ‘반박불가’, “인정? 어 인정!”으로 종결하려는 수많은 양산형 이준석이 등장했다. 정말이지 악한 영향력이다. 팩트폭격은 말 그대로 사실관계의 정보를 퍼붓는 행동이다. 올바른 정보를 주장의 근거로 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이 말은 ‘사실이기에 말해도 되고, 너는 반박할 수 없다’는 일그러진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반박하지 못하는 상대를 보며 효능감을 느낀다. 아무리 사실이이라도 주제와 무관하다면, 저급하다면, 제3자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면, 심지어 자기 자신의 품위를 위해서 등의 이유로 언급하지 않는 품위는 실종된다. 추한 논쟁에서 동원되는 소위 ‘팩트’가, 요즘처럼 정보가 오염되기 쉬운 시대에 사실관계가 틀리거나 신뢰성이 약한 경우가 허다한데도 그렇다. 상대를 반박조차 불가능한, 꼼짝도 못하는 상태로 만들어야 논쟁에서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가장 회피형의 사고 구조다. 논의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고, ‘나’가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사안이 복잡할 경우 쉽고 빠르게 결론이 나지 않는 모호함을 감당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충돌하면서 감정이 불편해지는 상황을 피하고자 아예 입을 틀어막고 싶어하는 것이다.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에서 공론장은 계급, 성별, 인종, 종교를 초월해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공적 사안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이상적인 생활 세계이다. 하버마스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참여하는 공적 숙의가 민주적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한다고 보았다.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은 그가 상정한 공론장이 사실상 노동자나 농민, 여성 등이 배제된 자유주의 엘리트 담론장에 불과하다고 비판받기도 했다. 한나 아렌트는 민주주의를 구성원들의 관계가 평등하고, 모두가 차별 없이 공적 영역에 진입하여 발언할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 고유함이라고 보았다. 즉 공론장이 곧 민주주의의 상징이다. 인터넷이 등장했을 때 사이버 공간은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숙의 민주주의의 새로운 공론장으로 각광 받았다. 인터넷의 개방성과 상호작용성, 그리고 익명성이 정체성과 계급에 갇히지 않는 새로운 소통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장밋빛 미래…가 지금 어떤 모습인지 우리는 뼈저리게 알고 있다. 특정 정치관을 주입하고자 개입하는 댓글부대의 여론 조작이 드러나고, 성차별과 성폭력은 해소되기는 커녕 디지털의 특수성과 결합하며 심화되었으며, 온갖 혐오발언과 타인을 조롱하는 밈이 횡행한다. 토론은 승패의 게임이 되었다.
관련하여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또 다른 유행어 또는 신조어가 “긁?”이다. ‘긁혔다’, 혹은 ‘긁는다’라는 표현의 줄임말로 주로 핵심이나 약점을 찔린 상황에서 쓰인다. 기존의 용례 역시 기분을 긁는다거나, 자극한다는 뜻이지만, 현재 쓰이는 맥락은 조롱과 멸시의 의미가 강하다.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한 뒤 “긁?”이라는 표현을 얹으면, ‘기분이 상한 사람’은 그 공격이 유효하다는 증거이자 그리고 ‘공격의 내용을 인정하는’ 것처럼 통한다. 이 말은 정당한 문제 제기조차도 개인적인 콤플렉스나 ‘기분’의 문제로 축소 시킨다. 예를 들어 비만을 조롱하는 글에 문제를 제기하면, “긁?”이라는 댓글이 달린다. “이게 긁힌 이유는 네가 뚱뚱하기 때문이다.” 무례한 행동을 하고 나서 상대가 불편함을 표현하면, “긁?”이라는 말을 써서 “이 정도에 감정이 상하는 네가 쩨쩨하고 예민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발신한다. 음, 기시감 미시감이 코끝을 스친다. 그렇다. 이 ‘긁?’의 정서는 과거 ‘프로 불편러’나 ‘웃어, 분위기 망치지 말고’와도 이어진다. 이렇게 이어지는 계보는 결국 하나의 꼬치에 꿰어져 있다. 생산적인 논의를 차단하는 종결의 어휘이자, 문제를 감정으로 환원하여 원인을 제공한 자의 책임을 덜어내고, 사과하거나 인정하는 대신 상대 탓을 하면서 조롱한다. 존중의 태도로 논의에 참가하고 발언을 숙고하며, 자기 의견에 책임을 지는 무게감은 속도전이 핵심인 인터넷 환경의 특성에서 점점 더 희귀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쉽게 비관하거나 냉소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12.3 내란사태 이후 열린 광장에서 새로운 공론장의 탄생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여의도, 광화문, 남태령, 한강진 등에서 열린 집회와 자유 발언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메리 올리버의 시 <기러기>) 발언자가 주어진 3분 동안은 자신의 삶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를 마음껏 쏟아내고, 수많은 인파가 그것을 경청하는 경험을 한 세상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온라인 공간에서 서로를 독려하고 정보를 공유하며 고립된 시민들에게 물품과 응원을 보낸 일 또한 지금의 공론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발화를 가로막고 타인을 조롱하는 태도가 지배적인 공론장과, 서로를 돌보고 연대하는 공론장이 공존한다. 이 치열한 경합과 충돌에서, 어디에 속하여 어떤 말을 듣고 어떤 말을 보탤지 선택할 수 있다. 긁지도 않고 이기지도 지지도 않는 곳에서,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가 있다.
<이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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