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박물관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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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주임 작성일 25-05-31 02:10 조회 2회 댓글 0건본문
어느 도시를 방문하든 박물관부터 찾아보는 습관이 있다. 아무리 일정이 빠듯해도 두세 군데는 꼭 들른다. 역사상의 수많은 물건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치 있다고 여겨져 보존되는 유물, 예술품, 기록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나의 생애를 훌쩍 뛰어넘는 오랜 세월을 견뎌낸 흔적을 마주하는 일도 즐겁다.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시간에 물리적인 형상이 있다면, 그것을 가장 직접적으로 감각할 수 있는 공간은 아마도 박물관이 아닐까. 시간이 흐르면서 언젠가는 사라질 것들을 붙잡아두는 일. 그것은 기억을 보존하는 일이자 망각에 저항하는 일이다.
박물관에서 가장 놀라운 순간은 까마득한 거리감을 느끼는 순간이 아니라, 아득히 멀다고 생각했던 과거와 현재가 포개지는 순간이다. 먼 옛날의 어떤 장면이 지금의 나를 스치거나 앞지르면서 하나로 뒤섞이는 순간. 그러니까 박물관이 품고 있는 매혹적인 분위기는 과거를 붙잡으려는 악력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시간을 겹치게 하는 느슨한 틈에서 온다. 어떤 물건에는 이상한 기운이 서려 있어 그 안에 과거, 현재, 미래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 순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박물관에 간다.
기억이란 과거를 붙잡는 것이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가 있다. 작년 여름에 출간된 안태운의 시집 <기억 몸짓>(문학동네)에 실린 ‘경주’다. 해 질 녘의 경주에서 박물관 근처를 산책하는 경로를 그리고 있다. “기억할 만한 것은 무엇일지. 해질녘. 짚이 타고. 냄새가 이리저리 번지고. 기억할 만한 건 무엇일까. 내가 지금 기억이라는 생각으로 이 도시의 공간을 드나든다면. 이제부터 이 시간을 하나하나 공간으로 둔다면. 내가 가는 곳마다 실바람이 불고. 해질녘. 호반새 날아들 것 같고. 퍼지고. 그렇게 나아가면서는 늦기 전에 박물관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지. 출토된 것들. 오랜 세월 드문드문 발굴한 것들. 한데 모아놓은 것들. 가면서는 따라가듯 하고 싶었어. (…) 박물관을 떠나면서는 다른 흔적들을 찾아볼 것이라고 다짐했지. 발견할 수 있다는 듯이 조사단원처럼 매우 주의를 기울이며 걸어갈 것이다. 걸어서 그 걸음이 어떤 순간인지 어떤 기억인지 알아채며 갈 것이다. 해질녘. 어쩌다가 나는 총() 주위에 있었고. 누가 살았는지 모르는 무덤 위로 온갖 동물들을 마주치는 듯하고. 그러니까 말, 소, 꿩, 사슴이 능선을 뛰어다니면서 모양을 이루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오묘한 능선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따라가고 있었는데 따라가는 나를 누군가 능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누군가를 또다른 말, 소, 꿩, 사슴이 따라가며 능선이라고. 능선과 너머, 그 이어짐은 끝없이 나열될 것도 같았는데.”
시의 화자는 박물관을 둘러본 뒤 총()으로 이동해서 무덤을 바라본다. 그리고 무덤의 능선을 따라 “말, 소, 꿩, 사슴”과 같은 동물이 지나가는 장면을 상상한다. 아득한 시간은 박물관 안에서 느껴야 할 것 같지만, 이 시는 오히려 박물관 바깥에서 다채로운 시간을 감각한다. 해 질 녘의 어둠, 짚이 번지며 타는 냄새, 어디선가 불어오는 실바람, 뛰어다니는 동물들의 움직임이 겹쳐 있는 천년의 감각. 이 시에서 기억은 가치를 선별하고 과거를 붙잡으려는 의지가 아니라, 걷는 걸음마다 풍경과 함께 매 순간 새롭게 생성되는 우연한 흔적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까. 기억은 과거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그저 흘러가게 내버려두어야 비로소 다시 마주칠 수 있다. 그것이 박물관에서, 일상에서, 그리고 시에서 우리가 잊히고 사라진 것들과 연결되는 방식이다.
박물관에서 가장 놀라운 순간은 까마득한 거리감을 느끼는 순간이 아니라, 아득히 멀다고 생각했던 과거와 현재가 포개지는 순간이다. 먼 옛날의 어떤 장면이 지금의 나를 스치거나 앞지르면서 하나로 뒤섞이는 순간. 그러니까 박물관이 품고 있는 매혹적인 분위기는 과거를 붙잡으려는 악력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시간을 겹치게 하는 느슨한 틈에서 온다. 어떤 물건에는 이상한 기운이 서려 있어 그 안에 과거, 현재, 미래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 순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박물관에 간다.
기억이란 과거를 붙잡는 것이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가 있다. 작년 여름에 출간된 안태운의 시집 <기억 몸짓>(문학동네)에 실린 ‘경주’다. 해 질 녘의 경주에서 박물관 근처를 산책하는 경로를 그리고 있다. “기억할 만한 것은 무엇일지. 해질녘. 짚이 타고. 냄새가 이리저리 번지고. 기억할 만한 건 무엇일까. 내가 지금 기억이라는 생각으로 이 도시의 공간을 드나든다면. 이제부터 이 시간을 하나하나 공간으로 둔다면. 내가 가는 곳마다 실바람이 불고. 해질녘. 호반새 날아들 것 같고. 퍼지고. 그렇게 나아가면서는 늦기 전에 박물관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지. 출토된 것들. 오랜 세월 드문드문 발굴한 것들. 한데 모아놓은 것들. 가면서는 따라가듯 하고 싶었어. (…) 박물관을 떠나면서는 다른 흔적들을 찾아볼 것이라고 다짐했지. 발견할 수 있다는 듯이 조사단원처럼 매우 주의를 기울이며 걸어갈 것이다. 걸어서 그 걸음이 어떤 순간인지 어떤 기억인지 알아채며 갈 것이다. 해질녘. 어쩌다가 나는 총() 주위에 있었고. 누가 살았는지 모르는 무덤 위로 온갖 동물들을 마주치는 듯하고. 그러니까 말, 소, 꿩, 사슴이 능선을 뛰어다니면서 모양을 이루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오묘한 능선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따라가고 있었는데 따라가는 나를 누군가 능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누군가를 또다른 말, 소, 꿩, 사슴이 따라가며 능선이라고. 능선과 너머, 그 이어짐은 끝없이 나열될 것도 같았는데.”
시의 화자는 박물관을 둘러본 뒤 총()으로 이동해서 무덤을 바라본다. 그리고 무덤의 능선을 따라 “말, 소, 꿩, 사슴”과 같은 동물이 지나가는 장면을 상상한다. 아득한 시간은 박물관 안에서 느껴야 할 것 같지만, 이 시는 오히려 박물관 바깥에서 다채로운 시간을 감각한다. 해 질 녘의 어둠, 짚이 번지며 타는 냄새, 어디선가 불어오는 실바람, 뛰어다니는 동물들의 움직임이 겹쳐 있는 천년의 감각. 이 시에서 기억은 가치를 선별하고 과거를 붙잡으려는 의지가 아니라, 걷는 걸음마다 풍경과 함께 매 순간 새롭게 생성되는 우연한 흔적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까. 기억은 과거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그저 흘러가게 내버려두어야 비로소 다시 마주칠 수 있다. 그것이 박물관에서, 일상에서, 그리고 시에서 우리가 잊히고 사라진 것들과 연결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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